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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①1·2차 대전···역사의 고비마다 '철도'가 있었다

김무연 기자I 2021.02.03 05:00:00

지상 강의 : ‘인더스토리Ⅲ’ 4강 철도(鐵道)
철도산업 태동기 스티븐슨 표준궤와 부루넬 광궤 전쟁
독일의 3B 정책과 영국의 3C 정책 충돌…1차 대전 발발
일제, 남만주 철도 이용해 대륙 진출…만주사변 일으켜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Ⅲ’ 4강 ‘철도’(鐵道) 편을 강의하고 있다. ‘인더스토리’는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코너로 시즌3에서는 교통·물류산업을 집중 조명한다.(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인류 문명에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철도는 역사적 사건마다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임규태 박사는 강조했다.

인류는 철도의 발명으로 육로를 통한 교통·물류 산업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그 뿐 아니라 철도는 역사적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의 라이스추크.
철도의 미래를 결정한 ‘스티븐슨과 브루넬의 대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호엔잘츠부르크 성에는 ‘라이스추크’라는 장비가 운용중이다. 라이스추크는 레일 위의 네모난 상자를 케이블로 끌어올리는 일종의 승강기로, 산꼭대기에 위치한 성으로 물자와 인력을 수송하는데 쓰인다. 1504년 운행을 시작한 이 장비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레일 이동수단으로, 철도의 원형으로도 알려져 있다.

산꼭대기나 광산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되던 레일 이동수단이 ‘철도’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는 증기기관의 발명이다. 1705년 토마스 뉴커먼이 증기기관을 고안해 냈고 제임스 와트가 열 손실을 최소화해 증기기관의 효율을 높이면서 본격적인 증기기관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 새로운 동력원은 제조업 뿐 아니라 ‘탈 것’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스티븐슨과 브루넬


1804년 영국의 발명가 리처드 트레비식은 증기기관을 이용한 고압 증기 기차를 발명했다. 트레비식의 기관차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발명품이란 의의가 더 컸다.

증기기관차를 상용화한 인물은 조지 스티븐슨이다. 당시 영국에서 철도를 국가적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본 모델이 될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공모했는데, 조지 스티븐슨의 기차가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기차의 시대가 열렸다.

다만 조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는 운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속도를 높이면 안정성이 떨어졌고 특히 커브를 돌 때 탈선의 위험이 컸다. 이를 보완한 것이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의 ‘광궤 열차’다. 브루넬은 궤도 폭을 스티븐슨의 1435㎜보다 넓힌 2140㎜로 운영했다. 선로 폭이 넓어지면서 열차 주행의 안정성은 높아졌고 탈선 위험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기술적으론 브루넬의 압승이었다.

궤도 폭이 다른 두 개의 선로가 운영되며 환승 구간에선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경제적으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영국 정부 내부에선 스티븐슨과 부르넬의 궤도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 격한 논쟁이 붙었다. ‘궤도 전쟁’의 시작이다. 기술적으론 브루넬의 광궤가 우위에 있었지만 증기기관차 사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스티븐슨의 1435㎜ 선로가 우여곡절 끝에 1846년 ‘표준궤’로 채택됐다. 현재도 대부분의 국가는 1435㎜를 표준궤로 사용하고 있다.

브루넬의 광궤 열차.
궤도 전쟁에 쏠린 대중적 관심은 영국의 철도 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스티븐슨과 브루넬의 갈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철도 관련 산업에 자금이 몰리는 ‘철도 버블’이 발생했다. 영국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도 산업을 융성할 기회를 잡는다.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을 거치며 철도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링컨 대통령은 물자 보급을 위해 철도 건설을 촉진하는 철도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남북전쟁은 물류의 거점인 철도역을 선점하는 철도 쟁탈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철도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동부와 서부가 철도로 이어진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의 전 국토는 철도로 빽빽이 연결된다. 국토가 넓은 미국의 특성상 철도회사와 철도역마다 기준 시간대가 달랐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1883년 미국은 현재의 표준시 제도를 채택한다.

독일의 3B 정책과 영국의 3C 정책(그래픽=문승용 기자)
◇ 철도서 시작해 철도로 끝난 1차 세계대전


1893년 독일 제 2제국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철로로 잇는 3B 정책을 수립한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은 철로를 이용해 중동과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당시 중동에선 유전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유전이 나올 수 있는 유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지 못한 독일로서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중동·아프리카에 눈독을 들인 국가가 독일만이 아니었단 점이다.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인도 콜카타(구 캘커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잇는 3C 정책을 수립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영국과 공동 경영하던 프랑스도 독일의 진출을 마뜩찮아 했다. 전통적으로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 또한 독일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결국 독일의 3B 정책에 불만을 품은 영국·프랑스·러시아, 이른 바 삼국협상과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으로 구성된 삼국동맹 간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임 박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을 두고 여러 학설이 제기되지만, 독일의 3B 정책과 영국의 3C 정책 충돌이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짚었다.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레닌.
1차 세계대전이 소모적인 참호전으로 번지면서 어느 쪽도 승리를 확정짓지 못하는 수렁에 빠진다. 당시 스위스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망명해 있었다. 레닌은 전쟁으로 어수선한 러시아에 돌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싶었지만 러시아로 돌아가려면 적대국 독일을 지나가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은 레닌을 귀국시켜 삼국협상의 한축인 러시아 제국을 혁명으로 붕괴시키는 전략을 세운다. 이를 위해 독일은 레닌이 탑승한 열차는 여권 검사를 하지 않고, 승객의 승하차도 금지하는 ‘봉인열차’ 상태로 독일 영토를 통과시켜주겠다는 밀약을 맺는다. 1917년 레닌을 태운 봉인열차는 독일, 스웨덴,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독일의 바람대로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고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권을 잡은 레닌은 약속대로 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빼겠다고 선언했다. ‘레닌의 봉인열차’는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1차 세계대전 종식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러시아 제국 붕괴로 독일의 승리가 목전에 있는 듯 했지만 막판 미국의 참전으로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이 났다.

경인선 부설 현장. 일본과 미국 국기가 걸려있다.


철도를 이용한 일본 제국주의 확장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아시아 최초로 일본에 근대식 정부가 수립되었다. 메이지 정권 창출에 공헌한 세력 간에 갈등이 커지면서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힘을 받기 시작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 행사는 물론 중국으로부터 각종 이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조선을 교두보 삼아 태평양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손을 잡고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다시 중국에 반납해야했다.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었고 조선에서의 영향력도 강화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감행했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러시아는 일본과 경인선 철도를 두고 갈등을 빚게 된다. 일본이 경인선을 1435㎜ 표준궤를 선택하자 조선에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던 러시아가 자국에서 사용하는 1520㎜의 광궤를 주장한 것이다.

결국 경인선 철도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의 주장이 관철됐다.

임 박사는 “어느 방식으로 철도를 깔기 시작하느냐에 따라 해당 국가에 대한 지배력이 결정된다”라면서 “조선에서 벌어진 ‘궤도 전쟁’은 동아시아 힘의 균형에 영향을 끼친 복잡한 이슈였다”고 말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철도 궤도 문제로 충돌한 일본과 러시아는 결국 조선 땅에서 일전을 벌이게 된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일본은 포츠머스 회담을 통해 러시아가 얻어낸 만주 철도 부설권을 빼앗아왔다. 1906년 일본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세워 남만주 철도(만철)을 부설하기 시작했고 관동총독부를 세워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만철의 경영이 악화하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대륙 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류탸오후에 위치한 남만주 철도를 폭파시키는 자작극을 벌인다. 일본이 이 사건을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이면서 ‘만주사변’이 발발하게 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설립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37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인 중일전쟁이 벌어진다.

임 박사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단순히 철도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철도를 부설한 것이 아니었다”며 “철도를 깐 뒤 철도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군사를 투입했고 해당 지역을 사실상 지배했다. 철도 부설권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위대한 생각’은…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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