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그래미 무릎 꿇린 여성 파워…이제 시작이다 [피용익의 록코노믹스]

피용익 기자I 2024.02.06 16:56:32

제너럴 필드 등 주요 부문 여성 아티스트가 싹쓸이
프로듀서·엔지니어 등 산업 전반은 여전히 남성 중심
“동등한 수준에서 동등하게 보여지고 싶다”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여성, 여성, 여성, 그리고 여성, 또 여성.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드는 최근 대중음악 시장의 여성 파워를 그대로 보여줬다. 올해의 레코드 상을 받은 마일리 사이러스(‘Flowers’),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Midnights’), 올해의 노래 상을 거머쥔 빌리 아일리시(‘What Was I Made For?’), 최우수 신인 상 트로피를 들어 올린 빅토리아 모네.

테일러 스위프트가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LA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후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AFP)
이게 끝이 아니다. 최우수 팝 솔로 퍼포먼스 마일리 사이러스(‘Flowers’), 최우수 R&B 노래 SZA(‘Snooze’), 최우수 팝 보컬 앨범 테일러 스위프트(‘Midnights’), 최우수 컨트리 앨범 레이니 윌슨(‘Bell Bottom Country’)…. 이쯤 되면 남성 아티스트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수상자뿐 아니라 후보 명단에서도 여성 아티스트의 이름이 더 많이 보였다.

심지어 남성 아티스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레게톤과 라틴 힙합 분야를 시상하는 최우수 뮤지카 어바나 앨범 상도 카롤 지(‘Manana Sera Bonito’)가 차지했다. 파라모어(‘This Is Why’)는 여성 보컬리스트를 내세운 밴드로는 최초로 최우수 록 앨범 상를 받았다.

이번 시상식에서 오프닝 공연을 한 두아 리파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정상에 서는 모습을 보니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테일러 스위프트나 빌리 아일리시 등 여성 아티스트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상을 못 받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음악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여성 아티스트가 늘 상을 받는 건 아니었다. 그래미는 여성 아티스트에게 박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두아 리파의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실제로 지난 2018년에만 해도 주요 수상자 중 여성 아티스트는 드물었다. 당시 그래미를 주최하는 레코딩 아카데미의 닐 포트나우 회장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직면하고 있는 ‘장벽’을 한탄하면서도 이들에게 “한 발 더 나아가라”고 말했다가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래미 어워드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확실하다. 2020년에는 당시 18세 소녀 가수 빌리 아일리시가 이른바 ‘제너럴 필드’(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 4관왕을 차지하면서 돌풍을 일으키더니 올해는 다양한 여성 아티스트들이 제너럴 필드뿐 아니라 그래미의 주요 상을 나눠 가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여성이 제66회 그래미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평가하면서 “이번 수상은 여성이 팝 음악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 한 해를 기념하는 동시에 여성 아티스트를 간과해 잦은 비판을 받아온 그래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래미 상을 휩쓸었다고 해서 여성 파워가 대중음악 산업을 지배하는 건 결코 아니다. USC 애넌버그 포용정책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오른 노래 전체 작곡가 중 여성은 19.5%에 불과했다. 여성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여성 아티스트들이 무대 위에서 주목받고 시상식에서 인정받는 것과는 별개로, 대중음악은 여전히 남성이 지배하고 있는 산업이라는 얘기다.

두아 리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업계에서의 평등한 공간이다. 창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동등한 수준에서 동등하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긍정적인 점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그래미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여성 아티스트들이 실력을 온전하게 인정받기 시작다는 점이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 작사·작곡, 프로듀싱,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