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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같은 상상력이 무대와 만난다면[알쓸공소]

장병호 기자I 2024.01.12 16:21:16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
기억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고군분투
움직임으로 표현한 ''한 사람의 두뇌 속''
치매 아닌 기억과 삶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

‘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남색 자켓을 찾다 빨간색 드레스를 발견한 톰(전성우 분). (사진=연극열전)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주연한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케미컬 브라더스, 다프트 펑크, 라디오헤드 등의 뮤직비디오로 잘 알려진 미셸 공드리 감독이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과 함께 2004년 선보인 영화입니다. 아픈 사랑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의 이야기를 독특하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한 찰리 카우프만의 천재적인 상상력,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상미가 빛나는 영화죠.

◇해외서 호평 받은 영국 극단 시어터 리 작품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선생님(김치영 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게 손을 들며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 학창시절의 톰(김지철 분, 오른쪽), 이자벨라(김주연 분, 왼쪽에서 두 번째), 엠마(강은나 분, 왼쪽). (사진=연극열전)
2024년 첫 ‘관극’으로 선택한 공연을 보면서 ‘이터널 선샤인’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오는 28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하는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입니다. 영어를 그대로 음차한 제목은 조금 어렵게 다가오는데요. 우리 말로 옮기면 ‘망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목처럼 작품은 인간의 기억을 다룹니다. 영국의 비주얼시어터 극단 시어터 리(Theatre Re)가 2017년 초연해 런던 국제 마임 페스티벌,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선 우란문화재단과 연극열전을 통해 2019년 오리지널 팀의 내한 초청 공연으로 처음 소개됐고요. 2022년 라이선스 공연에 이어 1년 만에 재공연으로 관객과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55세 생일을 맞이한 남자 톰입니다. 막이 오르면 딸 소피가 톰에게 할머니와 톰의 친구 마이크가 방문할 거라며 셔츠를 입으라고 건네줍니다. 빨간 넥타이도 잊지 말라며 셔츠 주머니에 넣어주고요. 하지만 톰은 소피를 “이자벨라”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자신 곁에 없는 아내이자, 소피의 엄마죠. 소피는 톰에게 말합니다. “소피예요”라고요.

그렇습니다. 톰의 기억력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소피가 떠나간 뒤 셔츠를 입던 톰은 소피가 빨간 넥타이를 주머니에 넣어줬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입어야 할 셔츠마저 잊어버린 톰은 옷걸이를 뒤적이다 오래 전 이자벨라가 입었던 빨간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톰은 잊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잠긴 문을 열고 자신의 기억 속으로 여정을 떠납니다.

◇기억은 사라져도…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톰(전성우 분, 오른쪽)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자벨라(전혜주 분). (사진=연극열전)
‘이터널 선샤인’과 마찬가지로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서도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한 표현입니다. 대사보다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피지컬 시어터답게 배우들의 몸짓만으로 이를 표현하죠. 여기에 2명의 연주자가 다양한 악기로 만들어내는 음악, 조명과 소품 등이 한 사람의 두뇌 속을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 보입니다. 반복되는 장면의 변화로 표현해낸 기억의 상실은 말 그대로 경이롭습니다. 작품 속에서 톰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단 한 사람만은 잊지 않고자 고군분투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이자벨라와의 기억이죠.

제작사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조기 치매로 기억이 얽히고 그 기억들조차 잃어가는 한 남자의 사랑과 우정,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삶의 유약함’ 그리고 ‘기억이 사라진 순간에도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그려내는 작품”이라고요. 그러나 작품은 단지 치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기억과 삶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연출가 기욤 피지 또한 프로그램북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조기 치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중요했지만, 작품이 어떤 개인의 망각 경험으로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려고 한 연인들은 모든 소동이 끝난 뒤 미소를 지으며 서로 다시 바라봅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서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던 톰은 자신 곁에 딸 소피를 비롯한 소중한 사람이 남아 있음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는 모두가 치매 환자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기억이 희미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삶입니다. 사실 새로운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처럼 당연한 주제를 것을 다시금 떠올리고 곱씹어 봄으로써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이터널 선샤인’이 공유하는 예술의 힘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결혼식에서 이자벨라(김주연 분, 왼쪽)에게 키스하는 톰(김지철 분). (사진=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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