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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마타하리? 시대를 앞서간 '경계인' 현미옥의 삶

장병호 기자I 2024.01.22 14:15:42

극단 미인 신작 연극 '아들에게'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 무대로
봉건적 시대에 저항한 주체적 여성
개인의 신념 지키는 삶에 대한 질문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개인의 신념보다 국가, 사회의 이념이 우선시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화와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반, 현미옥(미국 이름 앨리스 현, 1903~1956)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현미옥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역사는 ‘개인’을 내세운 현미옥을 지웠다. 남은 건 ‘한국판 마타하리’라는 가십성 수식어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의 한 장면.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난 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미인의 신작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는 시대를 앞선 ‘경계인’이었던 실존인물 현미옥의 실체를 찾아간다. ‘한국판 마타하리’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그동안 잊고 있던, 혹은 잘못 기억했던 현미옥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현미옥에 해 알 필요가 있다. 현미옥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로 건국훈장을 받은 현순(1880~1968)의 딸이다. 조선인이지만 미국 시민권자이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으나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중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힘썼던 현미옥은 해방 이후 좌익 독립운동가 박헌영(1900~1956)의 부름을 받아 북한으로 건너갔고, 1956년 숙청을 당했다. 박헌영도 같은 시기 숙청을 당했는데, 북한은 박헌영의 기소장에 현미옥이 박헌영의 첫 애인으로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현미옥이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러온 이유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의 한 장면.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 시간은 쉬는 시간 10분을 포함해 무려 170분에 달한다. 현미옥의 기구한 삶을 담기엔 170분도 부족하다. 작품은 심장을 울리는 드럼 연주와 함께 쉼 없이 내달린다. 조명과 영상을 활용한 삼면 무대가 인물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에게 미옥의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게 만든다.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단연 주인공 미옥(강해진 분)의 캐릭터다. 시대의 편견에 억눌리지 않는 미옥은 요즘 공연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주체적인 여성이다. 1막에선 그려지는 미옥의 연애·결혼 이야기가 그러하다. 미옥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연인과 결혼하고 딸과 아들을 갖게 되지만, 자신을 옭아매는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해 뱃속의 아들과 함께 하와이로 떠난다. 봉건주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시기, 미옥은 시대에 반항하고 저항한 인물이었음을 작품은 강조한다.

극이 전개되면서 관객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미옥은 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저렇게 많은 나라를 오가야 했던 것인지 말이다. 미옥 또한 끊임없이 되뇐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몇 번의 좌절 끝에 뉴욕에 머물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미옥은 동료 공산주의자로부터 “여성 동지는 남성 동지에게 봉사하는 게 의무 아니냐”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미옥의 삶은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세상은 미옥에게 하나만을 강요한다. 조신한 여성이 돼야 한다는 것, 사회의 이념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목의 ‘아들’은 현미옥의 아들 정웰링턴(1927~1964)을 가리킨다. 북한행을 택한 어머니를 따라 체코에 온 정웰링턴은 북한과 미국의 입국 거부로 어느 나라로도 가지 못한 채 체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은 과연 현미옥이 꿈꿨던 세상이 됐을까. 국가보다 개인이 중요한 세상이 됐지만, 이제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 타인의 이념, 신념을 재단하며 혐오와 차별을 일삼고 있다. 지금도 우리의 이념이나 신념이 존중받지 못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현미옥은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들에게’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이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의 한 장면.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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