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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타자' 이승엽이 직접 쓴 400홈런 기사

정철우 기자I 2015.06.03 19:17:47
이승엽이 스윙을 마친 뒤 홈런 타구를 바라보는 모습.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스타in 정철우 포항=박은별 기자]삼성 이승엽이 대망의 400호 홈런 고지에 올랐다.

이승엽은 3일 포항 롯데전에 6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전해 롯데 선발 구승민을 상대로 5-0으로 앞선 3회 2사 주자가 없는 가운데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포를 때려냈다.

이승엽은 이날 전까지 통산 399개의 홈런포를 기록했고 이번 홈런으로 400호 대기록을 달성했다. 통산 400호 홈런은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이승엽’ 1995년 세상에 이름을 처음 알렸고 이듬해 최고가 됐다. 그로부터 20년. 그는 늘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숱하게 많이 쌓아 온 기록. 그는 지난 20여년 간 늘 ‘읽혀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록과 결과물은 물론 사적인 행동 하나 하나까지 모두 뉴스가 됐다.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평가되고 분석되었던 사람. 그래서 더 스스로에게 냉정해야 했던 남자. 누구도 쉽게 꿈 꾸기 어려운 숫자 ‘400 홈런’은 그를 또 한 바탕 소동처럼 사람들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정작 400홈런을 치면 그는 어떤 말을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을까. 누군가가 지켜보고 적은 객관적 이승엽이 아닌 진짜 이승엽이 말하는, 아니 말하고 싶은 이승엽은 어떤 선수이고 사람일까. 그래서 물었다. “이승엽이 기자가 되어 이승엽의 400홈런을 기록해야 한다면 어떤 기사를 쓰고 싶습니까.”

이승엽은 “딱 하루만 내게 격려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날만은 ‘대한민국 최고 타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아직 단 한 번도 그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이승엽이 바라 본 이승엽은 그렇게 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지금까지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 갈 선수였다. 지금부터 그가 털어놓은 솔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승엽과 함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인생, 그리고 400홈런

프로 들어왔을 때 이정도까지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내 처음 목표는 삼성의 주전 선수였다. 그 때 마음 먹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 정말 많은 것을 이룬 셈이다. 오늘 참 모처럼 내게 만족하고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내게 관대하지 않았다. 늘 가장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건방져지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하루 하루 나와 싸움을 하며 살았다.

어쩌면 세상도 내게 관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내 장점 보다 약점을 먼저 얘기 했다. 예전에 대구 구장이 작았을 땐 구장 덕을 본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게 힘들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다. 프로 들어와서 가장 크게 느낀건 프로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 결과를 내야 한다. 아마추어 정도라면 그 과정을 겪고 프로 가서 열심히 하면 되겠지만 프로는 결과 못내면 도태될 수 밖에 없다. 일본에서 뛰던 시절, 잘 한 적도 있었지만 실패도 많았다. 그 실패를 겪으며 그걸 뼈져리게 느꼈다.

프로는 어차피 구단에서 나를 써 주는 거고 많은 연봉을 지불하기 때문에 그 정도 몸값은 해야 한다. ‘내가 나가서 잘 치면 그런 말은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뭔가 변명을 하고 항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남들이 인정을 해줘야 진정으로 스타가 되는거지 나 혼자 그러는 건 자아도취일 뿐이다. 내가 잘 하면 부정을 긍정으로 돌린다는 생각 뿐이었다. 또 그런 평가 때문에 오기도 좀 생겼던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은 갖지만 자만감은 갖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에 대한 박한 평가가 속상하지만은 않았다. 기록이 조금 낮게 평가되는구나 싶기도 했지만 그러니까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이룬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했던 것 같다.

자신감은 갖지만 자만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난 일단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했다. 누구보다 낮게 나를 평가하고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 준비했다. 그랬기 때문에 타석에는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들어간 것 같다. ‘준비 과정은 엄하게, 실전에선 자신감을 갖고’가 비결 아니었을까. 내 자신감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상대방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건방지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밖으로 나오면 자만이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아직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스타로 사는 삶

도망가고 싶었던 적 많았다. 모두가 주목하는 삶을 산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사인을 대하는 내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사인을 많이 했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못한다.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한 두명이면 몰라도 2~30명씩 있으면 다 해드릴 수가 없다. 어린 아이들의 요청을 외면하고 지나쳐야 할 땐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준비할 것들도 많아지면서 그런 시간들에 대해 조바심이 생긴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야구장 안에서는 여전히 건방져 지지 않으려고 한다. 홈런 쳤을 때 어지간하면 표정의 변화를 갖지 말자. 내실을 다지자고 다짐한다.

스타로서 산다는 건 나 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식구들이나 친구들하고 갈 때도 나는 괜찮지만 같이 간 일행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팬들은 내게 늘 큰 힘이 되어 주셨다. 야구가 안 될때나 좋을 때나 격려해주시는 분이 참 많았다.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격려와 힘을 얻을 때도 많았다. 결국… 그저 감사하다.

△TO. 400홈런의 주인공 이승엽에게

오늘 하루 쯤은 내게 ‘대한민국 최고 타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이승엽은 처음부터 최고를 목표로 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적을 내면서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자신감도 갖게 된 것이다.

아직도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400홈런을 치고 나면 한 번쯤은 그런 평가를 듣고 싶다. 현역, 은퇴 선수 상관 없이. 그 말 한 마디라면 정말 자랑스러울 것 같다.

400홈런을 치면 이제는 고민을 좀 덜자, 좀 편하게 하자는 생각을 갖고는 있다. 성적에 대한 부담감 주위에 대한 시선, 어려서부터 그걸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조금 더 릴렉스하게 하면 지금 연륜에선 좀 더 자연스럽게 야구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날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그건 분명 안될거다. 그런 마음을 먹으면 포기가 될 것 같다. ‘됐어. 할 만큼 했으니까’라면서….

긴장도 풀고 편하게 하고 싶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 세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 딱 하루만 그 말을 제대로 듣고 싶다. ‘대.한.민.국.최.고.타.자.이.승.엽.’



*덧붙이기 : 위 기사는 이승엽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것 입니다. 처음 제안을 했을 때는 396호를 친 다음이었는데요. 이 신중한 남자는 399호를 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오히려 부탁을 해왔습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은 “홈런은 언제 쳐도 상관 없으니 팀이 이길 때 안타나 좀 쳤으면 좋겠습니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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