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유리천장 걷어낸 도산서원

안승찬 기자I 2020.10.05 10:35:07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도산서원이 최근 언론의 이목을 크게 끌었다. 이달 1일 거행된 서원의 가을 제사인 추향(秋享)에서 국내 서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헌관(獻官)으로 참여한 일 때문이다. 우리 사회 여성들의 활동영역은 과거에 비해 꾸준히 넓어지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많은 유리천장이 엄존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맨 마지막 유리천장은 아마도 서원이나 향교처럼 전통 고수의 의지가 확고한 유림들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다들 예단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금녀의 구역이라 여겨지던 그 공간에서 헌관, 그것도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과 분헌관(分獻官)에 여성이 선임되었으니 충분히 이슈가 될 만했을 것이다.

도산서원은 그동안 시대의 흐름에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왔다. 수백 년 동안 여성에게 굳게 닫혔던 서원 사당 문을 2002년 여름 활짝 연 것이 첫 걸음이다. 서원 창설 426년 만에 처음이라며 그때에도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도산서원은 선비정신의 확산을 통해 도덕공동체 구현에 힘을 보태고자 부설기관으로 선비문화수련원을 막 설립한 터였다. 이때 사당에 모셔진 퇴계선생의 위패를 참배하며 선생처럼 훌륭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식인 알묘례(謁廟禮)를 남녀 수련생이 함께 행하도록 커리큘럼에 담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올해 6월부터는 그 취지를 확장하여 일반인들도 원하면 남녀 불문하고 전통 복장을 갖추고 알묘례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했다. 예란 “현재와 합당해야 하고 과거에서 멀어져서는 안된다(宜於今而 不遠於古)”는 퇴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틀리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여성에 대한 문호 개방을 알묘례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각성이 근래 서원 운영위원장인 퇴계종손을 비롯하여 구성원들 사이에 싹텄다. 그 결과 헌관도 남녀구분을 없애기로 하고 합리적 선정 기준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도산서원의 발전과 퇴계학 현창, 나아가 한국의 서원과 전통정신문화 창달에 공적이 뛰어나고 또 앞으로도 활동이 기대되는 분 등이 그 기준이었다. 이에 따라 올해 남녀 각 두 분이 선정되었는데, 헌관 위차는 유가의 법도대로 맹자의 ‘향당막여치(鄕黨莫如齒)’를 원용하며 나이순으로 정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초헌관으로 선정된 최초의 여성이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73세)이다. 지난해 7월 도산서원 등 전국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다. 2010년 국가브랜드 위원장 재직 시절부터 무려 10년 동안 선비정신과 서원의 참가치를 세상에 알려 한국의 국가브랜드를 높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역설한 끝에 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전통문화의 세계화에 한층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이어 아헌관에는 퇴계선생의 직계후손이기도 한 이동선 전 서울여대 대학원장(72세)이 선임되었다. 선조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늘 공부하며 조행과 처신에 수범을 보이는 분이다. 종헌관인 허권수 전 경상대 명예교수(68세) 또한 수많은 저술과 7만 권이 넘는 개인 장서 보유, 700명으로 구성된 연학(硏學) 후원회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 보배 같은 한문학자다. 지금도 진주에서 천릿길도 마다않고 오르내리며 퇴계선생 관련 문적의 정리와 번역에 매진하는 고마운 분이다. 한편 제자 월천 조공(조목, 1524~1606)에 잔을 올리는 분헌관에도 여성이 선임되었는데, 바로 퇴계 한시를 전공한 이정화 동양대 교수(54세)이다. 퇴계를 공부할수록 더욱더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서, 해마다 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참석하고 매번 적지 않은 헌성금을 내고 가시는 분이다.

이번에 최초의 ‘여성 헌관’이 가능했던 데에는 그동안 시대와 함께 하고자 한 도산서원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이루어졌다고 조심스레 되짚어본다. 앞으로도 서원 운영의 주요 의사결정에 있어서 ‘전통’과 ‘현대’라는 두 바퀴를 잘 조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이런 노력들이 퇴계선생의 소원처럼 착한 사람이 좀 더 많아지게 하는 데 일조하여 갖가지 이해관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반목과 갈등을 잠재우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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