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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혐오 발언에 '표현의 자유'는 없다

최은영 기자I 2020.09.02 06:00:00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변호사회장

최근에 한 유명 성우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가리켜 ‘주변 서민 빌라촌 아이들’이라고 발언해서 논란이 되었다. 당사자는 감염이 걱정돼서 쓴 글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아이들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그냥 ‘아이들’이나 ‘동네 아이들’이라고 지칭하기 마련이다. 굳이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서민 빌라촌 아이들’이라는 발언에는 우리 아파트 아이들과 다른 존재로 주변 빌라 아이들을 구분하는 인식이 깔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난다. 누군가에게, 더 나아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차별하거나 혐오를 드러낸 경험은 누구나 있을 수 있다. 필자 역시 혐오 표현을 단순한 욕설 정도로 생각하거나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것은 자유로운 표현을 가로막는 검열 기제로 여긴 적이 있다.

그런데 지방대 출신인 필자가 대학졸업 후 사법시험에 수차례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사회 곳곳에서 온갖 차별을 겪고 보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혐오 표현은 차별행위의 일종이라는 인식을 저절로 느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차별과 혐오를 잘 모르고 그랬다거나,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자칫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차별과 혐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고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것과 달리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혐오는 사람들의 양심과 사회 기준에 따라 많은 제악이 따른다. 하지만 정치성을 띤 경우에는 제재가 현저히 약화되기도 한다.

고 박원순 시장의 빈소를 나서면서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 차원의 대응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예의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발언을 했다. 후레자식이란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운 가정의 아이를 빗댄 혐오 발언이다. 한 시인은 조문을 보이콧하겠다고 밝힌 류호정 정의당 의원에게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난다”고 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미숙한) 사람에게 혐오를 드러내는 발언이다.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은 한동훈 검사장에게 “대들고 버티면 매를 더 버는 법임을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곱게 자라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라고 했다. 황 위원은 67년생이고, 한 검사장은 73년생으로 6살 차이다. 6살 차이에 ‘어려서 모른다’는 표현이 성립할 수 있나 싶기도 하지만,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임에도 ‘어리다’를 운운한 것은 상대를 모욕주기 위함이다. 그 모욕의 표현으로 선택한 것이 ‘어리다’였다.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나이가 적은 쪽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가능하다. 태극기 부대를 일컬었던 ‘틀딱’이 그런 경우다. 이들에 대해서는 나이보다는 그 정치적 지향점과 행위에 대한 불신과 혐오였을 것이다.

차별과 혐오는 기득권과 차별받는 이들의 지형을 보여준다. 차별과 혐오는 주로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상으로 행해진다. 때로는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고 반발하는 경우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별과 혐오는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모두 그냥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든지 원래 그런 사람이라든지, 차별과 혐오의 문제에 그가 어떤 정치적 지향과 이념을 가졌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고, 언젠가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주의자들이 등장하는 무대를 마련해주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혐오 표현을 차별의 일종으로 보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혐오 표현 규제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단순히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혐오 표현의 제한은 그 피해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혐오 표현을 양산하고 국론분열을 초래하는 정치권에 대해 혐오 표현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화에 나설 것과 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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