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진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에 소재한 호놀룰루미술관(Honolulu Museum of Art)에는 화면 전면에 금박을 깔고 열 마리의 큰 학이 노니는 장면을 그린 12폭 병풍이 있다. 18~19세기 제작된 ‘해학반도도’가 그것이다. 하늘에는 여러 빛깔의 상서로운 구름이 금박과 어우러져 있으며 그 아래로 복숭아와 학이 가득한 낙원이 펼쳐진다. 특히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이어지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일출을 배경으로 비상하는 학이 묘사돼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마치 대한제국의 번영을 염원하는 의미가 담긴 듯하다.
2005년 처음 이 작품을 조사한 전문가들은 이것이 18~19세기 조선 유물이라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일본에서 금병풍을 유독 크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화면 전반에 금박을 부착한 기법이 일본에서는 흔하지만 조선의 것으로 보기에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6년에 이 작품을 국내에서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국적은 완전히 조선이 될 수 있었다. 화면 오른쪽 암석에 숨겨진 글자 8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색은 바랬으나 금분으로 쓴 ‘군선공수임인하제’(僊拱壽壬寅夏題)라는 제발은 조선식 표기로 임인년 여름에 여러 신선이 장수를 기원하며 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인년 가운데 이러한 유물을 조성할 만한 해는 1902년이었다. 이 해는 고종(1852~1919)이 51세가 돼 기로소에 입소했을 뿐 아니라 즉위 40주년을 맞아 여러 차례 기념행사가 열렸다. 특히 고종의 생일인 음력 7월 25일은 황수성절이라는 국경일로 제정돼 외신을 초청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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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반도도는 어떻게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일까. 1922년 애나 라이스 쿡(Anna Rice Cooke, 1853~1934)이 설립한 호눌룰루미술관은 1927년 야마나카 상회(Yamanaka & Company)를 통해 해학반도도를 구입했다.
당시 야마나카 상회는 오사카에서 시작해 19세기 말 미국에 진출한 일본의 대표적인 골동상이었다. 당시 일본인 기업가 토미타 기사쿠(1859~1930)가 해학반도도를 야마나카 상회에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식민지 조선에서 광산, 금융, 학원 사업으로 돈을 번 토미타 기사쿠는 1922년부터 조선 왕실 미술품 여러점을 구입해 상회에 유통했다.
이렇게 1926년 조선을 떠나 미국땅에 도착한 해학반도도는 지난 200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8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존처리를 거칠 수 있었다. 이후 해학반도도는 서울과 하와이에서 몇 차례 전시를 통해 세간에 공개되면서 유물에 얽힌 역사와 의미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다.
서양식 궁궐 건축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형 금박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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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내에 지어진 수옥헌, 돈덕전, 정관헌과 같은 건물에는 높이 3m 짜리 병풍을 펼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는 이례적인 높이의 병풍이 서양식 궁궐 건축에 놓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옛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것을 참작하고 절충할 것’이라고 발표한 조칙이 건축과 미술에도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비록 14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한제국의 역사가 해학반도도처럼 조선 왕실의 계보로만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범주의 유물을 낳은 것이다.
한편 해학반도도와 상당히 유사한 금박 병풍이 3년 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소재한 데이턴미술관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이 작품 또한 금박을 배경 전면에 부착해 바다, 학, 복숭아를 주 소재로 삼은 대형 작품이다. 훌륭한 작품을 발견하게 돼 기쁜 마음도 잠시, 안타깝게도 이 병풍은 화면 전반에 손상이 심해 일반 공개가 어려운 상태였다.
다행히 해당 작품은 작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보존·복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병풍은 1년이 넘는 보존처리 과정을 마치고 다음 달 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특별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