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겸의 일본in]'순혈주의' 일본이 변했다? 올림픽에 등장한 '하푸'

김보겸 기자I 2021.07.25 10:21:14

기수자도, 마지막 성화주자도 혼혈 선수들
"세계에 다양성 보여주려는 일본의 열망"
적극적 이민정책으로 일본 거주 외국인↑
보수층 사이에선 단일민족 신화 여전
"日, 원할 때만 혼혈 편 선다" 비판도

농구선수 하치무라 루이(23)가 23일 도쿄올림픽 개회식에 기수로 등장했다(사진=AFP)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일본 선수단 중에서 홀로 우뚝 솟을 정도의 신장(203cm)에, 인사할 때는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아프리카 베냉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998년생 ‘하푸(ハ-フ·일본 국적 혼혈인)’ 농구선수, 하치무라 루이(23)가 23일 도쿄올림픽 개회식에서 일본 국기를 들고 등장했다.

마지막 성화주자로는 하치무라와 동갑내기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23)가 나섰다.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사카는 전 세계 남녀 스포츠인을 통틀어 수입 2위(약 690억원)에 오른 선수다.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가 마지막 성화주자로 나서고 있다(사진=AFP)
‘순혈주의’를 고집해 온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도쿄올림픽이 ‘다양성’과 ‘조화’를 대회 목표로 내세우면서 이번 일본 올림픽 대표팀 583명 중 다인종은 35명에 달한다. 뉴욕타임스(NYT)는 “개회식에서 가장 주목받는 역할 두 가지가 다인종 선수들에게 돌아간 건 일본이 세계에 다양한 얼굴을 선보이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 역시 “인종 동질성 사상이 오랫동안 지배해 온 나라에서 인종과 정체성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실제 현재 일본 사회에는 여느 때보다도 외국인이 많아졌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이민자를 수용한 결과, 10년 전 200만명이던 일본 거주 외국인이 300만명 수준까지 올라왔다. 여전히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있지만, 도쿄의 20대 중 적어도 10%는 외국 혼혈일 정도로 다양성이 커졌다는 평가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도 나아지고 있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1993년에는 30%만 찬성했지만 2013년에는 56%로 늘었다. 반대한다는 응답도 34%에서 20%로 줄었다. 그 결과 1980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 135명 중 1명만 다문화 가정 출신인 데 비해 오늘날은 50명 중 1명 수준으로 늘었다.

올림픽 개회식에서 공연단이 오륜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사진=AFP)
일본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외국인을 배척하는 나라였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고립주의 정책을 폈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내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면서다. 150년간 이어진 내전을 매듭짓고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는 게 최우선 목표인 도쿠가와 막부의 눈에 봉건질서를 비판하고 평등사상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17세기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이는 200년 넘게 이어졌다.

쇄국정책은 끝났지만 단일민족 신화는 남았다. 이코노미스트는 “제국주의 이후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일본인들과 일본의 경제적 기적에 대한 설명을 원하는 이들이 단일민족 신화를 재생산했다”고 꼬집었다. 동질성에 대한 환상을 갖고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오늘날까지 순혈주의에 매달린다는 설명이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지난해 1월 “2000년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조가 이어져 온 국가는 일본 뿐”이라고 말해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을 부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테니스의 왕자’ 원작자가 그린 오사카 나오미의 모습. 피부색과 머리색을 밝게 묘사해 화이트워싱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사진=CNN)
그래서일까. 도쿄올림픽에 혼혈 선수들을 앞세운 건 위선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일본 선수단 기수로 나선 하치무라도 “소셜미디어에서 거의 매일 혐오발언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다. 하치무라 뿐일까. 마지막 성화주자로 주목받은 오사카 역시 2019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뒤 ‘화이트 워싱(모든 작품 배역을 백인으로 캐스팅하는 행위)’ 당한 바 있다. 그의 후원업체이자 일본 최대 라면업체인 닛신식품이 오사카를 그린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피부는 하얗게, 머리는 갈색으로 묘사하면서다. 당시 오사카는 “내 피부는 누가 봐도 갈색”이라 일침했고 닛신식품이 사과와 함께 광고를 삭제하며 논란이 일단락됐다.

유명인들도 일본 내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일자리를 구하거나 월세집을 구하는 것도 혼혈 일본인들에겐 쉽지 않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일본 경찰이 영장도 없이 멈춰세운 뒤 수색하는 일도 이들에겐 드물지 않다고.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는 바하마 혼혈 오모테가와 알론조(25)가 이번 도쿄올림픽 개회식을 지켜본 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나라는 원할 때만 우리 편에 선다.”

개회식이 열린 23일 도쿄올림픽 경기장 밖에서 올림픽 반대 시위를 경찰이 진압하고 있다(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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