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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떼쓰는 어른들의 나라

이데일리 기자I 2024.04.16 06:15:00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며칠 전 끝난 총선에서 한 정당이 내건 핵심 구호는 ‘지금! 합니다’였다. 뭘 하겠다는 목적어는 없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우리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표어랄까. 이 당 대변인은 ‘책임감 있게 바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으나 공허한 말에 대한 국민의 응답은 선거 결과로 입증되었다.

정치의 계절을 보내면서 귓전을 어지럽혔던 소음들을 돌이켜 보니 문자 그대로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난장판이 아니었나 싶다. 사슴을 말이라 우기면 말이 되고, 도둑이 매를 들고 설치면 무고한 사람이 죄인 되는 꼴이었다. ‘말’의 수준에 미달하는 공적 소음들에 끝없이 시달려야만 하는 이 나라의 슬픈 운명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화의 영역에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요약하면 ‘언어의 타락’과 ‘모국어의 능욕’이라는 두 주제가 떠오른다. 주요 의제는커녕 정직하고 진실한 말 한마디를 듣기 어려웠다. 이제는 정치적 경향까지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볼 뿐이다. 조금이라도 말 같은 말을 하는 쪽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권력은 곧 언어의 독점이다. 권력에 취한 언어는 암세포처럼 자가 증식하여 자신을 기만하며 자기를 배반한다. 그런 거짓 언어에 덩달아 속아 넘어간다면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머지않아 부디 ‘말 같은 말’을 하는 진정한 정치세력끼리 겨루는 새 시대가 오기를 빈다. 각각의 정치적 지향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된 말을 경청함으로써 가늠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어쨌든 선거는 끝났다. 국민이 던진 표가 의미하는 바는 무섭다. 당선자나 낙선자나 그 준엄한 뜻을 두려워하며 받들고 되새겨야 한다. 그런데 투표 결과가 나오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별 움직임이 없다.

아닌 것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온갖 치기와 억지를 동원해서 관철하려는 짓이 ‘떼’다. 국어사전은 이 명사를 ‘부당한 요구나 청을 들어달라고 고집하는 짓’이라고 정의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떼가 단지 아이들이 하는 행태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떼쓰기는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우월하거나 힘 있는 사람을 상대로 벌이는 짓이나, 설사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어도 그 본성이 사라지진 않을 테다. 게다가 이 떼가 통하면 꽤 재미있고 뿌듯하기도 하니 말이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어른이 되었어도 이들이 부리는 치기와 억지, 부당한 요구가 질서정연한 언어일 리 만무하다. 떼가 하나의 문화가 될 때, 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참담한 ‘날리면’ 수준으로 추락한다. 떼는 본디 언어 이전의 영역이다. 설사 언어를 쓴다 해도 그 언어는 단지 음향의 차원에 머물 뿐이다.

‘권력자의 떼’는 이미 쟁취한 것을 더 얻고자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기괴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권력자의 예가 보여주는 떼쓰기의 압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떼쓰기다. 성숙하지 못한 인간은 자신에게 떼를 쓰고, 내면의 자아는 한두 번 거절하는 척하다가 끝내는 보듬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이 나라의 미래가 밝지 못한 까닭이 바로 이즈음에 있다. 사실관계를 뒤집어 놓은 정신 분열적 언어가 횡행하는 나라에서는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짓이 일상이다. 정의와 윤리에 대한 감각은 무너졌다. 아니, 애초에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불의인지 희미해져 버린 끝에 너나 할 것 없이 떼쓰는 태도만 남았다.

언어가 뒤틀린 곳, 음향의 수준으로 전락한 곳은 이미 사회가 아닌 정글이다.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가 사람답게 살 가능성은 날로 옅어지고, 당장 나부터 사람답게 살기 힘들다. 그러므로 자살률 1위, 출생률은 거꾸로 1위인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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