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승인도 안 받고 기밀문서 유출..금감원, 8개월 동안 까맣게 몰랐다

장순원 기자I 2020.10.29 04:02:00

허술한 내부통제 정황 드러나
중요문서인데 靑 전화 한통에 유출
김봉현 전 라임 회장에 바로 넘어가
감사원에 '금감원 공익감사' 청구

[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금융감독원이 코너에 몰렸다. 엄격한 내부통제 잣대를 들이대면서 금융회사를 몰아붙였지만, 정작 금감원의 내부통제는 허술했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서다.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니냐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라임 사태에서 드러난 금감원의 부실 내부통제

28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감원 자산운용검사국 소속 직원 A씨는 지난해 8월21일 라임의 검사계획 문건을 유흥주점에서 김모 전 금감원 팀장(당시 청와대 행정관)에게 넘겼다. 그 당시 라임자산운용 현장 검사를 나갔던 이 직원은 이날 낮 김 전 행정관으로부터 문건을 전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검사업무 탓에 문서를 전달하기 어렵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김 전 행정관은 밤 늦게라도 좋으니 문서를 전달해달라고 거듭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A씨는 업무를 끝내고 밤 늦은 시간 김 전 행정관이 찍어준 주소(유흥주점)로 가 문건을 전달했다. 이 문서는 곧바로 라임 김봉현 전 회장에 넘어갔다. A씨는 다음날인 22일 청와대 앞에서 문건을 김 전 행정관에게 한 차례 더 건냈다.

A씨는 이 일로 지난달 인사위원회에 회부돼 ‘감봉 3개월’ 처분을 받았다. 비밀준수의무를 어겼고 상부에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를 물은 것이다. A씨가 넘긴 문서를 전달할 당시 이 문서가 라임펀드 사기의 배후인 김 전 회장에게 넘어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금감원 측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경징계인 감봉 조치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래픽=이미나 기자)
금감원 안팎에서는 A씨에 대한 동정여론이 많은 편이다. 청와대 파견 나간 선배 직원에게 서류를 전달하는 것 자체는 일상적인 업무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산하기관의 주요 업무현황을 파악하려 파견받은 직원을 통해 문서 등을 수시로 요청하고, 산하기관은 이에 따르는 게 관례다. 또 A씨가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김 전 회장에게 직접적인 향응을 받지 않았다고 결론이 난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청와대 파견 직원에게 전달한 서류가 외부로 유출된다는 사실 자체를 본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헌 금감원장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행정관에게 자료를 건네준 것은 대접을 받은 게 아니다”라며 금감원 직원 A씨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금융사만 엄격한 잣대‥내로남불 논란

하지만 각종 민감한 정보를 갖고 있는 금감원의 내부통제가 지나치게 허술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민간회사에서도 중요한 서류를 반출할 때는 엄격한 규정에 따라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다. 금감원 역시 문서를 외부로 유출할 때 지켜야 할 내부규정을 마련해 놓았다. 최소한 담당 팀장이나 국장의 승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A씨는 이런 과정을 생략했다. 금감원은 라임검사문건이 외부로 유출됐다는 정황이 외부로 알려진 지난 4월 이후 A씨가 김 전 행정관에게 문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기 전까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청와대 직원의 전화 한통만 있으면 내부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중요문서가 외부로 흘러나가던 관행이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회장도 이런 허술한 고리를 파고든 셈이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기회에 청와대를 비롯해 힘있는 기관이 문서 등을 요구할 때도 엄격한 절차와 규정을 따르도록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감원 역시 엄격한 내부통제라는 기준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권은 금감원의 A씨 징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날이 서 있다. 금융회사에 대해선 엄격한 내부통제 의무를 앞세워 최고경영진(CEO)까지 중징계를 밀어붙이던 금감원이 자기 식구에 대해서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비판이다. 금감원은 오는 29일 라임사태 관련 판매 증권사인 신한금융투자와 KB증권, 대신증권 전·현직 CEO에 대한 제재심의위원회를 연다. 뒤이어 라임펀드를 팔았던 은행권도 금감원의 제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참여연대를 포함한 시민단체는 이날 “대규모 사모펀드 피해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적절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하면서 금감원의 감독 부실에 대해 감사원의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이 금융회사를 징계하려면 자신들부터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