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타인에 대한 이해와 위선 사이

안승찬 기자I 2020.09.16 05:01:00

정재형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올 여름 정말 지리했고(장마), 무덥고(폭염), 답답하고(코로나19), 위선적이고(정치) 힘들고, 슬프고, 외롭다. 여름 이야긴줄 알고 기대하고 봤던 <500일의 썸머>(2009)는 여름 이야긴 아니었다. 톰이라는 남자가 썸머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났던 500일을 정리한 로맨틱 멜로였다.

남녀 관계 갈등 대부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톰과 썸머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톰은 운명같은 여자를 만나길 꿈꾸던 로맨틱한 청년이고 썸머는 부모의 이혼으로 결혼에 대한 판타지가 없는 삭막한 여자였다. 첫눈에 반한 건 톰이었다. 다니던 카드회사에서 신입 사원 썸머를 만나 그녀를 이상형이라 점찍는다. 둘의 데이트는 일취월장했다. 맞지 않는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톰이 그걸 묵살해왔다. 쉽게 말해 눈에 콩깍지가 끼어 있었던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둑은 터지기 시작한다. 둘의 관계가 심각하게 삐걱거릴 때면 톰은 썸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변에 호소한다. 톰이 갈등하는 건 자신 만큼 썸머가 자신에게 열중하지 않는다는 거다. 같이 극장 가고 차 마시고 집을 오가며 잠자리도 같이 하는 사이면 연인인데 그저 친구처럼 생각하는 썸머가 톰은 못내 못마땅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양다리 걸친 것도 아니다.

느낌이란 거다. 톰이 일방적으로 썸머를 좋아한 거고 썸머도 나쁘지는 않아 좋게 지냈지만 그녀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런 관계는 언제든 깨진다. 썸머에게 이상형이 나타났고 그에게 시집갔다. 톰은 보기 좋게 차인다. 그 상처는 어마 어마 했고 그는 멘붕상태에서 폐인처럼 죽어 지냈다. 자신이 걸었던 모든 게 깨진 사람의 상처는 거의 지구 종말에 비유된다.

남자가 대체로 여자를 이해 못하는 것중 하나는 여자가 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것. 남자는 심한 경우 여자가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반대다. 여자 맘을 이해 못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남자 멋대로 행동하는 거다. 남자는 자기 맘에 있는 생각을 직설적으로 불쑥 불쑥 질러대지만 여자는 매사에 신중하다. 남자는 충동적인 반면 여자는 심사숙고 한다. 그걸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차이는 존 그레이가 말한 대로 화성인 남자, 금성인 여자만큼이나 멀다.

실연의 아픔은 대신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썸머와의 관계가 끝나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톰은 그동안 자신의 삶도 반성하게 된다. 그가 했던 모든 사랑의 말이 위선처럼 느껴지듯 카드 회사에서 자신이 했던 모든 말도 다 위선이었음을 깨달았다. 카드는 상대를 축하하고 위로하는 말을 담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만든다. 카드 안쪽에 썼던 그 많은 좋은 말들이 모두 다 거짓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소위 입에 발린 소리. 진정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직업적으로 했던 립서비스였던 거다. 톰은 여자의 맘을 이해했어야 한다는 진리를 뒤늦게 깨닫는다. 경이로운 새로운 우주가 시작했다.

알고 보면 우린 모두 깨닫기 전 톰과 같은 상황속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몸 담은 직업이 뭐 하나 남을 위하지 않은 일이 있는가. 교수도 학생을 위한 거고, 기자도, 의사도, 노동자도, 정치가도 모두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말속에 상대의 고통을 헤아리는 진심이 없이 그저 직업적으로 멋있는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마구 내뱉는 건 아닌지 뜨끔한 심정으로 반성해 본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