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유동성에 대한 맹신

권소현 기자I 2021.01.20 05:30:00
[이데일리 권소현 증권시장부장] ‘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

지금 내가 사는 이 자산을 누군가가 나중에 더 높은 가격으로 살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어떤 가격이든 정당화한다는 이론이다. 자산의 가격이 펀더멘털이 아닌 시장참여자들의 비이성적인 기대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코스피지수가 예상보다 빠르게 3000선을 넘고 3266선까지 터치하자 이 이론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이 상승장에 올라타지 않으면 ‘벼락거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대거 증시에 뛰어들면서 이같은 믿음은 더 강해진 듯하다.

그럴만한 게 주식매수 대기자금인 투자자예탁금은 70조원에 달한다. 작년 1월부터 개인투자자들이 코스피와 코스닥 합쳐 78조원어치를 순매수했는데도 증시로 들어올 수 있는 자금이 그만큼 더 남아있다는 뜻이다.

국내 은행권 예금에 머물러 있는 자금 1600조원 중에 주식시장으로 이동한 자금은 해외주식과 예탁금을 다 합해도 10%가 채 안되기 때문에 더 들어올 여력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세론자들이 증시 추가 상승을 점치는 이유 중 가장 1순위로 꼽는 게 바로 이 ‘유동성의 힘’이다.


피부로도 느껴진다. 어느 자리에서든 주식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안부 묻는 통화도 결국 “주식 뭐 담았냐, 어떤 주식이 좋냐, 이런 주식이 괜찮다더라”는 등의 대화로 끝난다.

모든 사회·경제 이슈가 주식으로 통하기도 한다. 최근 한 아파트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문 사진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됐다. “이 나라의 경제를 유지합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는 것은 면해야 할 것 같아요”로 시작한 이 안내문은 이재용 부회장을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유의 몸을 만들어달라는 국민청원 주소를 적고, 의사가 있는 분은 꼭 참여해달라며 정말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선처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 독려 안내문이 한 아파트 벽에 붙어있다.
얼핏 경제단체나 재계에서 발표한 성명 같기도 한 이 안내문은 아파트 주민이 붙여놓은 것이다. 누리꾼들은 이 주민이 아마 삼성전자 주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난 4일에 올라온 이 청원은 6만5000명 이상이 동의한 상태다. 이 부회장의 법정구속이 그저 뉴스를 통해 접하는 법조 이슈가 아니라 당장 내가 갖고 있는 삼성전자 주가와 연결되고 자산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동학개미가 지난해 1월부터 이날까지 삼성전자를 15조5000억원어치 이상 사들이면서 순매수 1위에 올려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삼성전자의 모든 뉴스가 개미의 자산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로 주식투자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면 누군가 내가 갖고 있는 주식을 더 비싼 가격에 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동성의 힘을 과신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마냥 좋을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돌변하는 게 투자심리다. 과거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이 꺼질 때에도 비슷했다.

특히 최근 미국 국채 금리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코로나19 펜데믹때 0.5%선까지 떨어졌던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어느덧 1%대로 올라왔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와 물가연동채(TIPS)의 금리차를 나타내는 기대인플레이션(BEI)도 2년여만에 2%를 넘어섰다.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슬슬 통화정책 정상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백신 접종으로 코로나19에서 좀 벗어나고 경기가 정상화될 수록 속도를 낼 것이다. 유동성 흡수에 대한 시그널만 나와도 시장 심리는 확 바뀔 수 있다.

돈을 빌려서까지 투자하는 ‘영끌’이 주식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더 우려스럽다. 신용융자 잔고는 연일 사상 최대를 갈아치우며 21조원을 넘어섰다. 주가가 오르기만 하면 행복하겠지만 최근 코스피 변동성이 커지면서 주가 하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져 증권사가 강제로 매도한 ‘반대매매’도 늘고 있다. 지난 14일 미수거래 계좌의 반대매매 규모는 387억원으로 금융위기때였던 2008년 10월 27일 이후 12년여 만에 가장 많았다.

더 큰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 가격이 유동성 요인 빼고 정당화할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산업구조의 변화, 그리고 혁신 여부, 실적이 핵심이다. 돈은 ‘더 큰 바보’의 손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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