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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혁신@미술]<18> 낡은 형식에 담아낸 에로티시즘, 자유를 얻다

오현주 기자I 2020.10.23 04:10:01

▲'보수혁신'의 기수 클림트
시대 트렌드인 추상 아닌 구상미술 속에서
사회질서에 도전한 '에로티스즘' 적극 표현
부도덕하단 비난에 "시대·사회가 더 위선적"
인간욕망 대한 '대중의식 뒤집은' 보수혁신

클림트의 ‘물뱀 Ⅱ’(1907). 비슷한 시기에 그린 ‘물뱀Ⅰ’의 후속작이다. 수면 아래서 유영하는 인어처럼 물의 흐름에 흔들리는 에로틱한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고 있다. 2019년 12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 6위( 2억 170만달러·약 2346억원)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 소장.


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미술 분야에서는‘ 혁신가’ 하면, 대부분 새로운 양식이나 사조의 주창자를 떠올리게 된다. 기존 양식과 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의 지평을 연 이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미술 분야의 혁신가가 아닐 수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이런 혁신가 축에는 들기 어려운 미술가다. 그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사람도 아니고 새로운 사조를 창시한 사람도 아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시즘에 기초해 대중적이고 관능적인 감성을 추구한 화가였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퇴영적인 화가로 여길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런 클림트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2009년 영국의 ‘더 타임스’가 세계 미술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투표를 했을 때 클림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미술가’ 3위로 뽑혔다. 누구나 미술 분야의 ‘최고의 파괴자’라고 꼽는 피카소와 세잔이 1, 2위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2019년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인플레이션율을 고려해 소비자물가지수에 의해 조정한 가격) 순위를 보면, 그의 ‘물뱀 Ⅱ’(1907)는 2억 170만달러(약 2346억원)로 6위에 올랐다.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Ⅰ’(1907)은 1억 7120만달러(약 1992억원)로 14위에 랭크돼 있다. 여러 미술 관련 매체나 기관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100점’을 선정할 때 클림트의 ‘키스’(1907∼1908)는 대부분 10위권에 든다. 전위적인 미술작품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에 이른바 ‘낡은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예술이 어떻게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중요한 건 파괴의 크기 아닌 ‘의식·발상의 전환’

이는 클림트가 그 낡은 형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보수혁신’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는 혁신이 꼭 기성체제의 전면적인 파괴나 해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라, 이를 유지하면서도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의식 혹은 발상의 전환이지 외적으로 보이는 파괴의 크기가 아닌 것이다. 혁신의 진정한 힘은 무엇보다 나만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서 나온다.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만 자신만의 시각으로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큰 파괴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분적인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클림트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가 10대였을 때 인상파 미술이 나왔다. 이어 신인상파·후기인상파가 나왔고, 그가 40대에 이르자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가 나왔다. 그가 50대가 됐을 때는 추상미술이 생겨났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미술의 주된 흐름은 이처럼 화면 자체가 전면적으로 해체되는 ‘추상화’(抽象化)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상미술은 구태의연하고 열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림트가 선호한 그림은 여전히 구상적인, 그에 따라 상당히 보수적인 형식의 미술이었다. 물론 그의 미술이 당시 새로운 장식미술 사조인 아르누보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계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형식의 그림이 그의 그림이었다.

이처럼 클림트의 예술은 외형적으로는 보수성을 띠었으나, 그의 내면에는 매우 진취적이고도 개방적인 측면이 있었다. 바로 에로티시즘의 자유로운 추구였다. 클림트는 당대의 그 어떤 예술가보다 에로티시즘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예술은 늘 관능으로 충만했다. 서양미술은 예로부터 누드미술을 발달시키는 등 관능성을 중시한 까닭에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추구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도, 혁신적일 것도 없었다. 그러나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노골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시각에서는 에로티시즘이 그림의 양념 역할을 해 ‘감칠맛’을 내는 정도라면 몰라도, 그 자체가 예술 표현의 궁극적인 목표가 돼서는 곤란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예술 차원을 넘어 가부장문화에 기초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

클림트의 ‘금붕어’(1902).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 여인을 등장시켜 당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향한 ‘입장’을 전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여체의 관능미를 내보인 그 시작으로 이후 ‘물뱀’ 연작이 나왔다. 개인 소장.


자연히 열심히 활동할수록 클림트에게는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부도덕하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다른 예술가들은 조형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는데, 그는 주로 도덕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술이 단순한 외설이었다면 그가 오늘날 이렇게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예술은 도덕을 핑계로 자신의 미학을 비판하는 사회와 시대가 오히려 이중적이고 위선적임을 역설적으로 폭로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관능적인 이미지를 줄기차게 그린 것은, 억압적이고 고루한 근대 유럽의 가부장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욕망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던 당대의 시대정신을 선도한 것이었다.

△“관능이 없었다면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나 했겠느냐”

당시 그의 예술과 사회가 충돌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학부회화’ 연작이다. 안타깝게도 1945년 화재로 망실한 이 연작은 ‘철학’ ‘법학’ ‘의학’ 3부작으로 구성돼 있는데, 오스트리아의 교육부가 빈 대학의 대강당에 설치할 목적으로 클림트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교육부는 이 ‘학부회화’를, ‘어둠을 극복한 빛의 상징들로서 인간 이성의 위대함과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에 입각해 표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1907년 완성을 코앞에 둔 ‘철학’이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성의 승리는커녕 관능적인 누드의 이미지들이 욕망과 무질서의 곤죽을 빚어낸 듯 보였기 때문이다. 빈 대학 교수들이 들고일어나 작품 설치 반대 청원서를 교육부에 제출했고,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다투어 비난 여론에 가세했다. 분노한 클림트는 작품 제작을 위해 받았던 선금을 돌려주고 다시는 이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클림트가 빈 대학으로부터 대강당 천장화 작업을 의뢰받아 제작한 ‘학부회화’(철학·의학·법학) 중 ‘의학’(1907). 삶과 죽음이 얽힌 에로티시즘을 테마로, 발표되자마자 ‘퇴폐미학’으로 찍히며 클림트를 신랄한 비난의 중심에 세운 작품이다. 1945년 나치 군대가 퇴각하며 저지른 방화에 모두 불타고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학부회화’ 스캔들 이전부터 비판에 시달린 그가 이 무렵 항의의 제스처로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다. ‘금붕어’(1902)란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깊은 심연에서 벌거벗은 세 여인이 부유하고 있다. 그들 중 가장 인상적인 여인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빨간 머리를 휘날리는 맨 아래쪽의 여인이다. ‘무닝’(mooning·비난이나 조롱의 목적으로 맨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행동)을 하듯 흰 엉덩이를 들이밀며 강한 도발의 의지를 내보인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되묻는다. “관능이 없었다면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나 했겠느냐”고, “당신들의 빛나는 지성도 다 관능의 산물이다”라고.

△대중의 의식 혁신…시각예술 에로티시즘 표현 제한 없어져

이처럼 혁신을 이루는 데는 꼭 기존 체제와 형식의 전면적인 파괴가 뒤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형식이나 골간은 유지하면서도 그 내용 혹은 정신을 새로이 함으로써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때 형식은 그 내용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외형상으로는 이전과 유사해 보여도 나름대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의식과 발상의 전환에 따라 형식이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개념이나 의미 혹은 가치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정치 쪽에서는 이런 종류의 혁신을 곧잘 볼 수 있다. 노사 대립이 격화해 사회 안정이 우려되자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의료보험·산재보험·연금보험 등 사회보험제도의 도입은 체제전복적인 급진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클림트 이후 시각예술에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이제 거의 아무 제한 없이 가능해졌다. 클림트는 노골적이고도 진지한 에로티시즘의 추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욕망을 보다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 조형의 혁신에 그가 기여한 부분은 비록 적을지라도 대중의 의식 혁신에 그가 기여한 부분은 그 어떤 예술가보다 컸다.

※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역사상 여성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를 묻는다면 단연 구스타프 클림트가 꼽힌다. 클림트는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했는데 ‘성녀’ 아니면 ‘요부’다. 이를 그의 사생활과 연결하면 ‘정신 따로’ ‘육체 따로’가 된다. 성녀든 요부든 클림트의 여성들은 그의 작품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우선 클림트의 요구에 관능적이고 외설적인 포즈를 거침없이 취해준 직업모델들이 있었다. 클림트가 사망한 뒤 사생아를 안은 여인들의 ‘생계부양비 청구 소송’이 14건이나 됐다는 건 그림 속 적나라한 묘사가 단순한 누드모델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들 중 대표격으론 미치 짐머만이 자주 오르내린다. 클림트가 41세에 그린 ‘희망Ⅰ’(1903)에 등장한 젊은 임산부가 바로 짐머만이다. 하지만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클림트에게 ‘공식적인 미망인’은 에밀리 플뢰게다. 수많은 여인과 살을 맞댔지만 유일하게 관계를 지속한 단 한 사람이었던 거다. 둘의 육체적 관계는 잠깐이었고 평생 정신적 동반자로 교감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클림트는 플뢰게를 네 번 그렸다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이다. 이분법적 구분에서 성녀 쪽에 세울 또 한 여인으론 아델리 블로흐바우어가 있다. ‘아델리 블로흐바우어의 초상Ⅰ’(1907) 등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는 엄청난 재벌집 안주인으로 클림트를 상류층과 연결시켜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클림트가 가장 선호한 모델이자 후원자로 평생 염문설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결국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을 완성한 일등공신이라면 그의 곁에 짧고 길게 머물렀던 모든 여성을 내세워야 할 듯하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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