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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70년 영동지구 신시가지개발계획이 나왔다. 영동은 영등포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이라는 의미다. 당시 영등포는 한강 이남에서 서울의 중심이었다. 강남은 스스로 이름을 갖기조차 어려울 만큼 서울의 변방이었던 것이다.
개발 초기는 변방 강남으로 정착을 유도하기 쉽지 않았다. 1976년 아파트지구를 신설하고 한강 변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이주는 시원찮았다. 강남으로 이사 왔다가 강북으로 돌아간 시민도 다수였다. 압구정현대아파트도 외면받던 시기였다.
이런 터에 당시 타의로 강남구민이 된 공무원이 숱했다. 정부는 1971년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를, 1972년 청담동에 시영 단독을 각각 지어서 공무원에게 분양했다. 1975년 서소문 법조타운을 강남(현재 서초구)으로 옮기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자발적인 이주를 위해서는 인프라 확충이 필요했다. 우선은 이동권을 대폭 강화했다. 1973년 개통한 영동대교는 한남대교(제3한강교·1969년 개통)와 함께 강북과 강남을 이어줬다. 서울시는 2호선을 순환선으로 개통하기로 했다. 애초에는 순환선이 아니었다. 강북의 고속터미널을 없애고 한데 묶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이 등장(1976년)했다.
교육시설이 옮겨간 것도 컸다. 1976년 경기고를 시작으로 휘문고와 숙명여고 등 강북 명문 고교가 강남으로 갔다. 서울고(서초구), 배제고(강동구)도 뒤를 이었다. 이로써 현재의 이른바 강남 8학군이 형성됐다. 학군이 형성되면 세대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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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강남구가 1975년 성동구에서 독립해 승격했고, 강동구(1979년)와 서초구(1988년)가 강남구에서 떨어져나왔다.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분리(1988년)되면서 지금의 강남 모습이 갖춰졌다. 이렇게 영동세브란스병원은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영동우체국은 논현동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동지구는 사라졌지만 영동은 여전히 존재한다. 학교, 교량, 대로뿐 아니라 강남에서 영동을 보기란 어렵지 않다. 대다수 금융사가 강남지점이 아니라 굳이 영동지점을 고수하는 식이다. 세월이 흐르며 강남구(54만명)가 영등포구(37만명)를 인구로서도 앞섰지만, 강남은 여전히 영등포 동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