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환경 외치는 거리의 붓…낙서로 세상을 꼬집다

오현주 기자I 2021.03.02 03:01:00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셰퍼드 페어리, 존 원, 뱅크시 등
세계최고 스트리트 아티스트 6인
'그라피티 아트' 80여점 한공간에
현대미술로 자리잡은 저항아이콘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전경. 셰퍼드 페어리, 존 마토스 크래시, 존 원, 뱅크시, 제우스, 빌스 등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6인의 80여점을 전시한다. 건물 폐자재에서 잘라낸 사물에 구멍을 내거나 겹겹이 붙이는 콜라주로 유명인의 초상을 새기는 빌스의 평면·입체작품, 붓처럼 휘두른 스프레이 페인팅으로 현란한 색채감을 얹어낸 존 마토스 크래시의 회화작품이 보인다(사진=이영훈 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미 반전이다. 어디에도 가둘 수 없는 형태니까. 그림이든, 조각이든, 아니라면 그림 위의 조각이든, 조각 위의 그림이든, 훤히 뚫린 개방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예술이니까. 거리예술을 의미하는 그 ‘스트리트 아트’를, 갇힌 사각의 공간에 들인 것 자체가 반전이고 역설이란 얘기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거리를 떠나 단단한 화이트큐브 안에 모여들었다면.

어느 나라 어느 거리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그들이 6인 6색으로 한 장소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춘 전시를 여는 거다. 서울 중구 통일로 갤러리선의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이미 자기영역을 공고히 다져둔 그들이 각자의 역량을 그대로 살려 ‘튀는 조화’를 이뤄냈다.

국적과 활동을 달리한 역대급 아티스트들의 집합이다. 미국 출신인 셰퍼드 페어리(51)와 존 원(58), 존 마토스 크래시(60), 프랑스 출신의 제우스(54)와 영국 출신의 뱅크시(48), 포르투갈의 빌스(34)까지. 이들의 이름과 작품을 걸고 2일 개막하는 전시의 부제는 ‘지식+행동=힘’.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힘’(power)이란 게 결코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는다고 뚝 떨어지는 게 아니란 의미를 담았다. 어쭙잖은 지식(knowledge)만으로, 치기로 무장한 행동(action)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일침이고, 지식과 행동이 적절히 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시너지가 나온다는 소신이다.

‘지식+행동=힘’이란 명제는 사실 셰퍼드 페어리의 ‘오베이’(OBEY)로 대표되는 포스터 연작 중 한 점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고 비단 셰퍼드 페어리만의 철학으로 볼 것도 아니다.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를 외치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환경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쓰고 버리는 일회성 소비문화를 반대해온 6인의 접점이기도 하다. 오는 6월까지 3개월여간 대장정을 이어갈 전시는 한없이 가볍고 또 무한히 무겁다.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전경. 셰퍼드 페어리, 존 마토스 크래시, 존 원, 뱅크시, 제우스, 빌스 등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6인의 80여점을 전시한다. 뒤쪽으로 제우스의 유명브랜드 로고가 흘러내리는 듯 묘사한, ‘리퀴데이션 로고스’ 연작이, 앞쪽엔 그라피티 기법을 바탕으로 마음대로 긋고 흘린 유려한 붓놀림에 반복적인 조화를 실어내는 존 원의 회화와 드로잉이 걸렸다(사진=이영훈 기자).


‘지식+행동=힘’ 주제로 ‘그라피티 아트=저항정신’ 살려

태생이 ‘불온’했다. 스트리트 아트란 게 말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생산주의 예술론을 지지했던 러시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1893∼1930)가 대중을 위한 ‘선전미술’을 만든 게 기원이니. 당시 마야콥스키는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고 광장을 우리의 팔레트로 삼자”란 구호를 열심히 외쳤더랬다.

이후 반세기쯤 지났을까. 열풍이 일어난 건 엉뚱하게도 러시아 반대편인 미국이었다. 1960년대 후반 공공장소에서 수시로 그리지고 지워지는 벽화들로 인해 ‘거리미술’이란 용어가 자리를 잡아갔다. ‘빨리 제작하고 잽싸게 도망가야 하는 아트’의 다른 말이었다. 건물의 벽이든, 지하철역이든 정부가 볼 때 탐탁지 않았던 장소도 장소지만, 이들의 테마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50년 전 러시아에서 표방했던 정치색은 저리 가라 할 정도. 소수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 반대, 에이즈 퇴치, 반전, 핵전쟁에 대한 공포 등등 굵직한 사회적 메시지는 끝없이 확산해갔다.

형식도 도드라졌다. ‘낙서’다. ‘새기고 긁다’에 어원을 둔, 글과 그림의 통칭이라고 할 ‘그라피티’는 분무(스프레이) 페인트를 도구로 삼은 ‘낙서화’의 고급 버전으로 쓰였다. 거기에 ‘비딱한’ 반항심까지 얹은, ‘그라피티 아트=저항정신’이란 공식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도시의 그 골칫덩어리가 현대미술로 자리를 잡은 건, 원조격이라 할 키스 해링(1958∼1990)과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의 ‘낙서’의 힘이 컸다. 이번 전시에 모인 6인의 아티스트는 해링과 바스키아와 같은 1세대부터 2세대 즈음까지다. 단명한 두 사람이 미처 이루지 못한 기법과 내용으로 범위를 확장했고 주제를 심화시켰다.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전경. 셰퍼드 페어리, 존 마토스 크래시, 존 원, 뱅크시, 제우스, 빌스 등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6인의 80여점을 전시한다. 인물·도안·문구에 강렬한 색을 씌우고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녹여낸 셰퍼드 페어리의 ‘오베이 브랜드’가 전시장을 한 벽을 채웠다(사진=이영훈 기자).


거리 아티스트일 뿐…미술가이길 거부한다

스프레이는 기본이고, 물감은 덤이다. 마분지는 필수고, 캔버스는 덤이다. 80여점 전시작은 장르의 결합으로도 눈길을 끈다. 셰퍼드 페어리는 ‘오베이 브랜드’라 일컫는 스텐실 작품 22점을 걸었다. ‘반전’(反戰)으로 묶이는 ‘반전’(反轉)이 도드라진다. 사랑스러운 소녀가 폭탄에 꽂힌 장미의 향을 맡고 있는 ‘워 바이 넘버스’(War by Numbers·2019), 폭격이 난무한 땅에 낙타를 탄 행렬을 그려넣어 ‘위험한 휴가지’를 표현한 ‘그리팅스 프럼 이라크’(Greetings from Iraq·2019) 등이 나왔다.

비슷한 작업은 뱅크시도 했다.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소녀상이다. 유일한 마분지 스텐실 작품인 이 ‘범 허거’(Bomb Hungger·2015)는 아티스트가 추구해온 작품세계를 한눈에 정리해 낸다. 이외에 전시작은 2015년 디즈니랜드 안에 차렸던 디즈멀랜드에서 썼다는 ‘디즈멀 달러’(2015) 시리즈 20여점으로 꾸렸다.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전경. 셰퍼드 페어리, 존 마토스 크래시, 존 원, 뱅크시, 제우스, 빌스 등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6인의 80여점을 전시한다. 뱅크시의 ‘디지멀 달러’(2015) 시리즈. 2015년 58명의 예술가와 함께 디즈니랜드 안에 ‘음울한 땅’이란 뜻을 담은 디즈멀랜드(Dismaland)를 개장했다는 지폐다(사진=이영훈 기자).


‘리퀴데이션 로고스’ 연작으로 유명한 제우스는 8점을 걸었다.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의 로고에서 ‘눈물을 빼내는 듯한’, 물감 흘려 내리기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들이다. ‘루이비통’(2009), ‘샤넬’(2015) 등 전통 브랜드 외에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네이버’(2020)와 ‘LG’(2020)가 시선을 잡는다.

평면에 입체감을 실어내는 작업은 빌스가 맡았다. 벽을 깎아 거대한 인물상을 새겨왔던 그가 전시에는 그의 소프트 버전이라 할 손조각 5점을 내놨다. 거리에서 모은 광고포스터를 겹겹이 쌓아 레이저컷으로 도려낸 작업이다. 문짝을 그대로 떼어내 촘촘한 홈으로 얼굴을 만든, 빌스 특유의 오브제도 눈에 띈다.

이외에도 존 원은 ‘라운드 더 월드’(Round the World·2019) 등 자유분방한 붓선이 묻어나는 캔버스 작업 12점을, 존 마토스 크래시는 ‘댄싱 인 더 레인’(2020), ‘더티 리틀 시크리트’(2020) 등 스프레이 페인트를 캔버스에 붓처럼 뿌려 현란한 색채감을 얹어낸 9점을 걸었다.

바닥에 깔린 주제는 ‘자유’다. 자유를 위해선 차별도 없애야 하고 전쟁도 막아야 하는 것이니. 그뿐인가. ‘미술가’란 반듯한 타이틀까지 거부하지 않았나. 오래 전 ‘낙서금지’가 키워냈을 ‘드라마틱한 반전’까지 더듬어 볼 자리다.

갤러리선 개관전 ‘스트리트 아트’ 전경. 셰퍼드 페어리, 존 마토스 크래시, 존 원, 뱅크시, 제우스, 빌스 등 내로라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6인의 80여점을 전시한다. 그라피티 기법을 바탕으로 마음대로 긋고 흘린 유려한 붓놀림에 반복적인 조화를 실어내는 존 원의 캔버스 회화작품이 보인다(사진=이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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