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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 이 작품] 말라 신음하는 샘 속 깃든 철거민 애환

양승준 기자I 2014.12.01 06:40:00

- 심사위원 리뷰
연극 '그 샘에 고인 말'

연극 ‘샘이 고인 말’의 한 장면(사진=극단 코끼리만보)


[송현옥 세종대 교수] 무대 위엔 초라한 기와집과 그 옆쪽으로 샘이 하나 있다. 마당 안의 평상에 한 노파가 한숨짓고 앉아 있고, 샘 안에선 웬 남자가 신음소리를 낸다. 지난달 30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연극 ‘그 샘에 고인 말’. 첫 장면부터 관객은 한참을 궁금증으로 시간을 보낸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의 정체나 서로의 관계 역시 분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에 극이 진행돼도 의문점은 쌓여만 간다.

대사 위주로 이루어진 정극이지만 이 작품은 왠지 말을 아끼고 있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나누지만 속내를 알 수는 없다. 서로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아니면 침묵이다. 정확한 사정을 알기는 어렵고 추측만 할 뿐이다. 특히 가장 궁금했던 존재는 샘 안의 남자다. 거지 행색을 한 그를 보며 이젠 더이상 솟지 않는 샘물을 의인화한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작품은 개발을 이유로 오랜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사회적인 문제와 추억을 엮어 무대에 펼쳤다. 마을이 재개발돼 낡은 집은 곧 헐려나갈 처지이고, 노파는 모두 떠나고 유일하게 남은 며느리에게마저 버림 받을까봐 전전긍긍한다. 잔잔하게 진행되던 극이 중반에 이르면 샘물은 용솟음친다. 우물가의 아낙들이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한바탕 속풀이를 했던 샘물이다. 웃음과 생기가 넘쳐났지만 이제는 말라버린 샘처럼 아낙들의 입도 마른다. 말 수도 없어지고 감정도 메말라간다.

갑자기 등장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샘 귀신의 옛이야기를 통해, 한때는 아름다웠을 이 마을의 풍경이 상상되자 비로소 현재의 인물들이 지닌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파의 아들은 엄하기만 했던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아내를 버리고 도시로 떠났다. 하지만 아들의 소식을 알고 있던 노파는 그 사실을 며느리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기적으로 보이는 노파도 이제는 늙어서 주름이 얼굴에 가득하다. 그러나 샘은 알고 있다. 주름은 말을 뱉느라 생긴 것이 아니라 힘주어 삼키느라 깊어진 거다. 남편에 대한 비밀을 어쩌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만 시어머니와 소통하지 않고 시집살이를 참아왔을 며느리. 그녀 역시 이 샘에서 얼마나 많은 속을 털어냈을까. 그런데 이들 고부는 어딘가 닮아있다. 서로의 비밀을 삼키는 삶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드디어 이 집을 떠나야 하는 날, 손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며느리는 그동안 차마 버리지 못하던 남편의 옷가지들을 불태우고 시어머니는 결국 샘에 몸을 던진다.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는 것이다. 그러나 샘은 남은 자들에게 다시금 솟아나는 물을 선사한다. 모든 말을 삼키고 다시 시작되는 연극처럼.

송현옥 교수
송현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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