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4흘' 논쟁…두터워지는 세대 간 언어장벽

손의연 기자I 2020.10.09 08:42:00

'사흘', '3일'인가 vs '4일'인가 논쟁
"언어 사용 변화는 막을 수 없지만"
"언어로 구별짓기는 경계해야"

[이데일리 손의연 기자] “하루, 이틀까진 알아도 닷새, 엿새, 이레…열사흘, 그믐까지 셀 수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요?”

지난 8월 ‘사흘’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누리꾼 사이에서 논쟁이 불붙었다. ‘광복절부터 임시공휴일인 17일까지 사흘간 연휴’라는 뉴스가 보도된 후였다. 사흘은 ‘3일’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임에도 “3일 쉰다”와 “4일 쉰다”로 의견이 갈렸다. 사흘의 ‘사’를 ‘四(4)’로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을 두고 젊은 세대의 어휘력과 문해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말보다 글로 하는 소통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모를 수 있다는 변호 의견도 있다.

한글날 관련 이미지 (사진=연합뉴스)
“말보단 문자로 소통하는 게 편해”

경기도에 사는 40대 여성 A씨는 최근 가족 단체 채팅방에서 중학생 아들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놀랐다. 이틀을 ‘2틀’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평소에 애가 새로운 말을 쓰고 엄마 아빠가 모르면 ‘요즘 이거 모르면 안 돼’라는 식으로 설명해 주기도 한다”라며 “하지만 막상 메시지에 숫자를 섞거나 자음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걸 보고 우리 애 국어 능력이 우려스러웠다”라고 말했다.

언어는 사회와 문화 현상을 반영해 끊임 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사흘’ 논란은 빠르게 변화한 언어가 세대 간 갈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사흘이라는 단어가 기성세대 대화에선 자연스럽게 사용됐지만 젊은 세대의 대화에선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됐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소통 문화는 기성 세대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예전엔 직접 만나서 대화하거나 전화를 걸어 소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문자나 SNS 메시지 등으로 대화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SNS,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주로 이용하며 댓글로 소통하는 특징도 있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성인남녀 10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절반 가량인 49.2%가 ‘메신저 앱·문자 등 비대면 의사소통에 익숙해졌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도 차이를 보인다. 순우리말보다 외래어, 외국어를 선호하는 경향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금은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 새로운 매체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신조어가 ‘우리말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청소년은 신조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지난해 ‘스마트학생복’이 청소년 12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71.8%(906명)가 ‘맞춤법에는 신경을 쓰지만 습관적으로 줄임말과 신조어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들 중 61.5%(776명)가 ‘SNS나 메신저를 이용할 때 신조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A(29)씨는 “SNS나 유튜브,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또래 문화가 형성되는 측면 때문에 신조어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 빨리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시대 흐름 막을 수 없어…‘구별짓기’ 로서의 언어 경계 필요

이런 현상이 언어파괴와 집단 간 소통 단절을 야기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언어가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며 변화 자체를 막을 순 없다고 지적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변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분별한 언어 사용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어가 집단을 가르는 ‘구별짓기’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유행어를 모르면 뒤처진다는 인식을 갖게 하면서 세대 간 차이가 심화되는 것이 예다.

우리말교육현장학회 편집위원인 김중수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젊은 친구들은 표기로 하는 소통에 익숙하고, 문자나 채팅으로 소통하면서 빨리 타자를 치려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흐레’보단 ‘9일’을 사용하면서 줄임말 같은 신조어를 만들게 된다”라며 “구별짓기를 통해 외국어나 신조어 등 순우리말이 아닌 말이 생겨나는데 소외되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쓰면서 확대 재생산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말이 너무 널리 쓰여 구별짓는 기능이 없어지면 또 다른 말을 만들어 남들과 차별화를 꾀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 때문에 해당 언어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생겨 소통에 어려움이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부부터 변화 필요”

최근 정부는 관련 부처를 통해 우리말을 홍보하고, 공문서에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등 바른 언어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기준을 잡아야 하는 정부나 지자체가 포스터나 슬로건 등을 만들며 외국어나 신조어를 섞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세대도 경각심을 느끼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부처와 지자체가 유행하는 말을 찾거나 있어 보이는 영어를 사용해 기관 이름이나 슬로건을 짓고 있는데 이를 자제해야 한다”면서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더라도 비대면이라는 말 대신 ‘언택트’라는 말을 정부, 지자체가 많이 썼는데 공적 기관부터 올바른 말을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또 청소년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튜브엔 최소한의 거름 장치도 없어 걱정스럽다”며 “방송이나 유튜브를 보면 출연자가 줄임말 등 유행어를 사용하는데 자막에라도 올바른 말을 대체해 넣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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