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울리는 회계정책]“코로나도 힘든데 현미경 감사까지”…靑 청원 올라간 회계개혁

박종오 기자I 2020.11.30 04:02:00

"내부회계 감사로 기업 고통" 靑에 민원제기
중소·중견기업 비용·업무 부담 커져
美, 중소 상장사엔 감사 면제…"韓도 완화해야" 주장

[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내부 회계 관리 제도로 인해 많은 기업의 재무·회계 실무진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지난달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정부의 회계 정책 보완을 촉구하는 민원 글이 올라왔다. 정치나 부동산 등 일반 경제 이슈가 아닌 회계 제도 때문에 청와대에까지 민원이 제기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청원인은 “대기업은 회계법인에 수십억 원의 용역비를 써서 제도에 대응하지만, 중소·중견기업은 사람을 갈아 넣는 수밖에 없다”며 “쓸데없는 절차만 늘리는 보여주기식 업무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회사가 문을 닫거나 빚내서 회계법인에 외주 비용을 대야 하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 청원에는 500여 명이 동의했다.

금융 당국이 추진 중인 ‘내부 회계 감사 제도’를 향한 중소·중견 기업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회계 투명성 강화라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회사의 부담이 크고 실효성도 미심쩍다는 것이다. 정부의 회계 개혁 정책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픽=김정훈 기자
내부회계 감사에 중소·중견기업 부담 ‘껑충’

내부 회계 감사 제도란 기업의 재무제표 작성 및 공시 과정 전반을 외부 회계법인으로부터 검사받는 것이다. 단순히 회사에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결제 내역 뿐 아니라 재무와 관련된 의사 결정 절차, 관리 시스템 등에 문제가 없는지 회계사가 일일이 감사하고 ‘적정’ 또는 ‘비적정’ 의견을 제시한다.

내부 회계 감사는 지난해 자산 2조원 이상 대형 상장사를 대상으로 처음 시행해 올해 자산 5000억원 이상 상장사까지 적용 대상이 확대됐다. 오는 2022년에는 자산 1000억원 이상, 2023년부터는 모든 상장사가 감사를 받는다. 이전에는 단순 검토 대상이었지만, 정부의 회계 개혁 방침에 따라 규정이 강화된 것이다.

문제는 중소·중견 기업의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올해 처음 내부 회계 감사를 받는 한 상장사의 재무 담당 임원은 26일 “정부의 회계 감사 강화 여파로 최근 1~2년 새 회계 법인에 내는 감사 비용이 2~3배 늘었다”면서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비로만 수억 원을 쓰고 내부 통제 시스템 구축과 인력 확충에도 시간을 쏟아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하소연했다.

현장의 업무 부담도 커졌다. 중소 상장사 실무자는 “공시 하나를 낼 때도 이메일로 승인받던 것을 이제는 기안서를 올려서 확인받아야 하는 등 의사 결정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세부 절차가 훨씬 많아졌다”며 “실무와 동떨어진 형식적인 업무 때문에 다들 일이 늘었다고 힘들어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런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정부 방침을 따르는 것은 제재 때문이다. 코스닥시장 상장사는 내부 회계 감사에서 2년 연속으로 비적정 의견을 받으면 상장 폐지 심사를 받는다. 코스피(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경우 별도 제재가 없지만, 금융 당국 감리를 받거나 재무제표 감사에서 회계법인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한 상장법인의 회계사 출신 임원은 “사실 회계사들 사이에서도 내부 회계 감사 제도가 정말 회사의 투명성 강화에 도움이 되는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라며 “실효성이 분명치 않은 제도를 민간 기업에 강제해 회계업계 먹거리만 챙겨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처럼 중소기업 내부 감사 면제해야”

1~2년 뒤부터 내부 회계 감사를 받아야 하는 소규모 상장사도 걱정이 많다. 자산 1000억원 미만인 상장 제조업체 전무는 “내부 회계 관리 제도는 단순 자금 결제뿐 아니라 생산·영업·재고 관리 등 회사 전반의 관리 절차에 문제가 없는지 감사받으라는 것”이라며 “회사의 모든 프로세스를 점검해야 하는 만큼 시스템 구축, 전담 조직 구성 등 중소기업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내부 회계 감사 대상이 2022년부터 해외 자회사까지 확대되는 것도 부담이다. 상장법인 1개사가 지배하는 국내·외 자회사 수는 평균 12개(2017년 말 기준)에 달한다. 한국과 다른 제도와 법규를 적용받는 국외 종속회사까지 같은 감사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기업들은 지적한다.

외국은 다르다. 한국보다 이 제도를 먼저 도입한 미국은 2010년부터 시가총액 7500만 달러(약 830억원) 미만 상장사의 내부 회계 감사를 면제해 주고 있다. 신규 상장 기업도 일정 요건을 만족하면 최장 5년간 감사를 받지 않는다.

일본도 규모가 작은 신규 상장사의 내부 회계 통제 감사를 3년간 면제하고, 중소기업에 적용하는 감사 지침을 간소화하는 등 부담 완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이 같은 감사 제도의 이행률이 저조하고 실효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별도 규제를 하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고 정책 실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한국회계학회도 최근 연구 보고서를 통해 “자산 1000억원 미만인 중소 상장사는 미국처럼 내부 회계 감사를 아예 면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김이배 덕성여대 회계학과 교수(전 한국회계정책학회장)는 “중소기업의 내부 회계 통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면서도 “코로나19 등으로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만큼 규제보다 기업이 회계 처리를 잘하도록 지원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이미 1년 유예 기간을 두고 작년부터 단계적으로 제도를 시행 중인 만큼 감사 적용 시기를 무조건 미루자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자산 1000억원 미만 상장사까지 감사를 의무화하는 것이 과도하다는 지적에는 일부 공감한다. 다만 이는 법을 개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입장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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