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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끄덕끄덕]K콘텐츠 성지순례길 단장하는 법

송길호 기자I 2023.09.21 06:15:00
작년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4월8일과 9일 또 15일과 16일에 얼리전트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BTS 콘서트 때문이었다. 4회 공연 20만석이 1시간 만에 매진됐고 직관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라이브 방송에 4회 회차당 1만7000명 관객이 참여하는 열기로 채워졌다. 흥미로운 건 이 4회 공연 기간 동안 라스베이거스는 아예 도시를 BTS 시티로 꾸며 이 곳을 방문한 팬들이 온전히 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이다. MGM 리조트 인터내셔널은 라스베이거스 안의 11개 호텔을 BTS 테마 객실로 운영했고, 레스토랑에서는 BTS가 좋아하는 비빔국수, 치킨, 김밥, 붕어빵이 메뉴판에 올랐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의 여운은 애프터 파티로 이어졌는데, 도시 곳곳 클럽은 BTS 음악에 춤을 추는 팬들의 물결이 일렁였다.

작년 BTS의 라스베이거스 공연은 종종 콘텐츠가 도시 관광에 미치는 경제효과의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2020년 이 곳에서 열린 CES(Consumer Electronics Show)로 약 18만 명이 도시를 찾았고 약 2093억 원의 경제효과가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작년 BTS City Project로 온 관람객만 약 30만 명으로 이베스트 투자증권의 추산에 의하면 약 1조5000억 원(1인당 3박4일 총 지출액이 약 500만 원)의 경제효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콘텐츠 하나가 도시 관광에 미치는 경제효과는 이처럼 어마어마하다.

이런 일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BTS가 10주년을 맞아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축제행사에는 12만 명의 외국인들이 몰렸다. 이들은 하이브 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BTS의 성지로 불리는 유정식당을 찾았고, 행사 당일에는 한강공원으로 몰려 들었다. 이로 인해 서울의 호텔 등이 때 아닌 관광 특수를 누렸지만 라스베이거스만큼의 임팩트를 남긴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K콘텐츠는 이제 전 세계에서 이를 보고 매료되어 한국을 찾을 정도로 기막히게 만들어내는데, 이를 받쳐주는 관광 인프라나 활용은 아직 미미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K팝의 성지는 당연히 한국이고, 그래서 전 세계 K팝 팬들은 한국을 성지순례하듯 찾아올 의향이 다분한데 서울에는 이들을 수용할만한 공연 인프라가 부족한 현실은 최근 잠실 올릭픽 주경기장이 시설 노후화로 인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곳이 휴관에 들어가자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조경기장은 수용인원을 나눠서 공연을 하느라 2주에 걸친 장기공연이 벌어지게 됐다. 서울에는 3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 주경기장과 상암월드컵경기장 두 곳뿐인데, 상암경기장은 잔디 보호를 위해 2017년 이후 공연을 하지 않고 있다. 최근 영국의 유명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월드 투어에 한국이 빠지게 된 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BTS와 ‘My Universe’를 불러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콜드플레이가 한국에서의 공연을 원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공연을 할 수 있는 스타디움급 공연장이 없어 무산된 것이다.

K콘텐츠는 글로벌 존재감을 떨치고 있는데, 이를 활용한 관광 인프라가 일천한 건 K팝 이외의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돼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는 외국인들이 촬영지를 찾는 이른바 ‘성지순례’가 생겨난 작품이기도 하다. ‘오징어게임’의 경우 드라마 속 배경이었던 쌍문동 백운시장이나 CU 쌍문우이천점, 상봉터미널 같은 곳이, 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경우 우영우 김밥의 촬영지였던 수원의 일식집 카자구루마와 회전문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센터필드 같은 곳이 성지가 되었고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으로 봐도 그곳이 관광 상품처럼 굳이 가볼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저 촬영지를 배경으로 인증샷 하나를 남기는 정도다.

이것은 K콘텐츠를 통해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그 촬영지를 ‘성지’처럼 찾아가고픈 욕망이 충분하다고 해도 지금의 관광 인프라가 그것을 적극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오징어게임’으로 쌍문동에 있는 편의점을 찾는 일을 그저 신기하게 바라볼 게 아니라, 차라리 한국의 편의점 문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을까. 외국인들도 한국에 오면 이제 유명 관광지를 찾기보다는 편의점 바깥에 놓인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셔보는 경험을 더 원하고, 찜질방이나 노래방 같은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해보기를 원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특정 공간에서 했던 어떤 경험들을 K컬처로 알려주는 일은 그래서 ‘성지 순례’에 머물고 있는 관광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콘텐츠의 매력을 통해 관광산업을 끌어올리는 이 방식을 이른바 ‘콘텐츠 투어리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현재 전 세계의 여행 패턴 중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프로도(극중 주인공 이름)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광객을 끌어 모은 뉴질랜드의 사례나, 영화 ‘라라랜드’로 관광 특수를 맞았던 LA의 사례, 또 ‘해리포터’ 시리즈나 ‘노팅힐’ 같은 영화로 매년 관광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영국의 사례처럼 콘텐츠 투어리즘은 현재의 관광산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최근 들어 K콘텐츠라는 명칭이 나올 정도로 전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만큼 이를 받쳐주는 관광 인프라는 아직 일천한 상황이 아닐까. K콘텐츠를 바탕으로 이를 독특한 K컬처로 이끌어내는 관광산업의 적극적인 스토리텔링과 그 인프라를 만들어내기 위한 여행 산업 종사자들과 콘텐츠업계 그리고 정부의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한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건 여행업, 콘텐츠업계의 산업을 부흥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국가 이미지 제고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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