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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프리즘]고소·고발 만능 공화국

송길호 기자I 2021.09.14 06:10:00
[법률사무소 제이 박주희 변호사] 지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은 윤석열 전 총장측이 야당에게 여권 정치인에 대한 고발을 사주했다는 의혹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강용석 변호사 등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의 출연진들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딸과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아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돼 체포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처럼 고소·고발 사건은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하루에도 여러 번 포털 사이트에는 고소·고발 뉴스가 올라오고, 정치인이나 시민단체 관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수사 기관에 고소장이라고 적힌 서류봉투를 들고 기자단 앞에 서는 모습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고소·고발 건수는 약 50만 건, 한 달로 계산하면 약 4만 건이다. 이는 일본의 사정과 비교하면 40배가 넘는 수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범죄율이 40배나 높다고 볼 수도 없다. 고소·고발되는 건수 중 실제로 기소되는 확률은 20%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고소·고발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많이 지적되어 온 문제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에 비해 고소·고발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법시스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분별한 고소·고발을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하고 있다.

소위 공인이라고 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조금이라도 반대 진영에서 공격을 받거나 의혹이 있으면 바로 고소·고발을 하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비친다. 정치적인 논쟁을 사법화 시켜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들고 갈등을 봉합하기 보다는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가세했다. 정무적 문제를 고발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얼마 전 공공의대 도입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을 상대로 고발했다가 취하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소·고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프로 고발러’라고 불리는 시민단체들이다. 물론 이들이 제기하는 고소·고발에는 가려져 있던 비리나 불의를 밝히는 공익에 부합하는 고소·고발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보이는 시민단체의 고소·고발은 정치적 이슈에 합세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목적이 보이거나 정치적 수단으로써 이슈의 당사자 일방을 위해 제기해주는 고소·고발이 대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윤 전 총장의 고발 사주 의혹은 제기되자마자 20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윤 전 총장과 관련자들을 ’고발‘했다는 뉴스가 보도됐고, 제보자로 지목된 이도 윤 전 총장을 ’고소‘하겠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이렇게 넘쳐나는 고소·고발의 더 큰 문제점은 고소·고발의 대부분은 제대로 된 법리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일단 하고 본다’는 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뉴스를 보면 법리적으로 성립 가능한가 싶은 고소·고발도 많고, 심지어 친고죄(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한 죄)임에도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고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실제로 기소가 되든 말든 그저 고소·고발 했다는 보도로 이슈를 잠재우거나 반대로 보도가 됨으로써 이슈를 키워보려는 속셈일 뿐이다. 언론에 고소·고발 됐다고 등장한 사건 중에 결과까지 심도 있게 보도되는 경우가 드문 것만 봐도 그들의 고소·고발은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목적이었든 간에 고소·고발장이 접수되어 사건번호가 부여된 이상 이를 처리하는 건 수사기관의 업무가 된다. 수사기관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이슈가 잠잠해질 때까지 사건을 방치했다가 뒤늦게 수사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례적으로 과도한 수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건 수사기관의 업무 과중으로 밀려버리는 일반 민생 사건들이다.

검찰의 정치화를 비난하고 개혁의 대상으로 몰고 가지만 정작 수사기관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건 정치적 논쟁을 무분별한 고소·고발로 해결하려는 정치인들과 그에 합세하는 사람들이다. 6개월 남은 대선을 두고 그 사이 후보자들끼리 얼마나 많은 고소·고발이 이루어질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민생 안정과 사회 통합을 꾀하는 후보들이라면 적어도 대선레이스에서 ‘되든 말든 일단 하고 보자’는 식의 고소·고발을 지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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