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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극으로 만나는 호메로스 서사시, 묘하게 빠져드네

장병호 기자I 2021.07.20 06:00:00

[리뷰]국내 초연 연극 '일리아드'
그리스 트로이 전쟁 100분 압축
반복되는 전쟁의 비극과 현실 조명
김종구·최재웅·황석정 '3색 재미'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연극 ‘일리아드’가 공연 중인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스24 스테이지 2관. 공연장에 입장하면 텅 빈 무대가 관객을 맞는다. 무대 뒤편엔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이 늘어서 있고, 왼쪽 구석엔 악기들이 놓여 있다. 반대쪽 구석엔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리어카와 허름한 침낭 하나 뿐. 아무도 없는 무대라고 생각한 순간, 거리의 부랑자처럼 수더분한 모습의 배우가 침낭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연극 ‘일리아드’에서 내레이터 역을 맡은 배우 최재웅의 공연 장면(사진=더웨이브)
‘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에 쓴 것으로 알려진 서사시 ‘일리아스’를 1인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미국 연출가 리사 피터슨, 배우 데니스 오헤어가 공동으로 각색한 희곡으로 2010년 시애틀 레퍼토리씨어터에서 초연한 뒤 8개국 17개 도시 무대에서 관객과 만났다. 공연 홍보마케팅사 더웨이브가 제작을 맡아 지난달 29일 국내 초연으로 개막했다.

작품은 10년 동안 펼쳐진 트로이 전쟁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을 그린다. 그리스의 아킬레스, 트로이의 헥토르의 대결을 중심으로 전쟁에 끼어든 그리스 신화 속 신들, 전쟁으로 목숨과 터전을 잃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가 100분간 압축적으로 펼쳐진다. ‘고대 그리스’ ‘기원전 8세기’ ‘서사시’ 등의 단어를 듣는다면 자연스럽게 무겁고 지루한 연극이 떠오른다. 그러나 ‘일리아드’는 이러한 편견을 과감히 깬다.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가 전하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영화 못지않은 강한 흡입력으로 관객을 이끌기 때문이다.

연극 ‘일리아드’에서 내레이터 역을 맡은 배우 황석정의 공연 장면(사진=더웨이브)
1인극인 만큼 배우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연기 변신의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대결, 그리고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스를 찾아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장면은 고도의 연기력을 요구하는 ‘일리아드’의 하이라이트다. 전쟁의 주역, 증인, 희생자로 시시각각 변신하는 내레이터를 통해 관객은 신, 영웅, 나라가 충돌했던 전장을 여러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극 중반, 전쟁 이야기를 하다 지친 내레이터는 관객을 향해 이들의 전쟁이 어떻게 반복돼 왔는지를 절규하듯 외친다. 남북전쟁,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미얀마 사태까지 시대를 흐르며 반복된 갈등을 통해 작품은 우리의 역사가 ‘전쟁의 반복’임을 돌아보게 만든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배우는 퇴장 없이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배우 김종구, 최재웅, 황석정이 내레이터 역으로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배우가 온전히 만드는 극인 만큼 세 배우가 각기 보여주는 ‘3색 재미’도 ‘일리아드’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지난 15일 공연에선 배우 최재웅이 사과를 먹기 위해 2000원을 주고 과도를 샀다는 애드리브로 관객에게 웃음을 전하기도 했다. 오는 9월 5일까지 공연한다.

연극 ‘일리아드’에서 내레이터 역을 맡은 배우 김종구의 공연 장면(사진=더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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