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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1920년 1월 24일 서른여섯 살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틀 뒤 새벽에는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1898∼1920)마저 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이 일은 며칠을 못 넘기고 모든 파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임신 6개월이고 친정집 6층이었대.” “아니야. 만삭이고 친정집 5층에서 뒷걸음질로 뛰어내렸다는군.” “뱃속의 아기는 어쩌고. 너무 안 됐네. 큰딸은 이탈리아에서 자라고 있는 건가?” “이탈리아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고모가 키워준다나. 겨우 14개월이야. 불쌍하게 됐지.”
그들의 연이은 죽음은 가십성 소문을 좋아하는 파리 사람들을 들썩이게 했다. 죽음으로 유명세를 치른 모딜리아니가 남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었다. ‘20세기 초반 독특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모딜리아니가 후대에 이름을 날리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었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밥값 대신 건넨 그림, 식당 불쏘시개로 던져지기도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의 카페 로통드에서 모딜리아니는 시인 장 콕토(1889∼1963)의 초상화를 그렸던 적이 있었다. 그림값으로 5프랑을 받았지만 콕토는 그림이 너무 커서 차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카페에 그냥 두고 갔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보다 더한 사건은 1917년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유일하게 열었던 개인전이 외설 혐의를 받고 폐쇄된 일이다. 어이없게도 누드에 음모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 사유였는데, 이 시기가 보수적인 가치관이 전방위적으로 해체되고 있던 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독 모딜리아니에게만 가혹했던 시대착오적 폭력처럼 보였다. 이 일은 그에게 ‘실패한 작가’라는 낙인을 찍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궁핍했던 모딜리아니가 밥값 대신 식당주인에게 건네준 수많은 드로잉은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기름을 닦는 데 사용됐다. 그가 남긴 캔버스 작품들은 부서진 창틀을 지지하거나 캔버스 천만 잘라 침대 매트리스를 보수하는 데 유용했다. 그의 작품이 당대 파리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구체적인 사실들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생전에는 거의 팔리지 않던 그의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 불과 1∼2년 만에 수천 배로 가격이 뛰었다. 화상들이 그의 비극적인 삶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해 “살아선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천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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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딸에 의해 모딜리아니에게서 제일 먼저 벗겨진 것은 ‘방탕한 중독자’라는 세간의 자극적인 껍데기였다. 흔히 모딜리아니를 파멸로 이끈 주범으로 지목되던 술과 마약은, 실상 방탕한 유흥이라기보다 처절한 생존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결핵과 합병증의 극심한 고통을 잠시나마 마비시키기 위한 유일한 마취제로 말이다.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도달한 예술적 지점은 비참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정제되고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생애 단 한 점뿐인 ‘자화상’(1919) 속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목도리를 정성껏 두른 모습이다. 몸을 파고드는 질병의 냉기와 죽음의 그림자를 꽁꽁 싸맨 옷으로 간신히 막아내면서 그는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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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현실과 대조 이룬 정제되고 순수한 작품들
그렇다면 모딜리아니가 생애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자 동지를 그린 ‘잔 에뷔테른의 초상’(1918)은 또 어떨까. 모딜리아니가 남긴 수많은 에뷔테른의 초상 중에서도 유독 흰옷이 도드라진 작품은 특유의 정형화된 양식미가 절정에 달해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에뷔테른은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이 ‘푸른 눈’을 두고 딸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린 어머니의 푸른 눈은 “외부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먼 곳의 이상을 응시하는 ‘영혼의 창’이었으며, 부서질 듯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잃지 않았던 에뷔테른만의 내면적 강인함과 기품을 드러내는 요소”였다.
모딜리아니에게 에뷔테른은 단순한 모델을 넘어 현실의 비참함을 초월한 ‘성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딸이 복원하고 싶었던 진실은 어머니 에뷔테른이 단순히 아버지를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뮤즈’나 ‘희생양’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전도유망한 파리의 미술학교인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수학한 신진작가 에뷔테른이 직접 그린 ‘자화상’(1917)은 모딜리아니의 캔버스에서 우아한 곡선으로 미화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화상’ 속 에뷔테른은 보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단호한 눈빛을 가지고 있으며 거침없는 필치, 실험적인 화면을 구사하는 주체적인 창작자다. 모딜리아니가 에뷔테른을 성스러운 미학적 대상으로 박제했다면, 에뷔테른이 스스로 기록한 자신은 고뇌하고 투쟁하는 한 명의 독립된 예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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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