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윤희 미술평론가] “올해에는 나도 무사히 그리운 집으로, 당신에게로, 그리고 나의 일로 돌아가겠습니다. 끝 모를 참혹한 파괴의 형상들 속에서 귀향에 대한 생각만은 이루 다 그려낼 수 없는 후광을 두르고 있답니다.”
1916년 3월 4일 1차 세계대전 한가운데 프랑스 북동부의 베르덩 전선에서 아내에게 써 보낸 편지는 마지막 전언이 되고 말았다. 편지를 부친 바로 그날 오후, 서른여섯의 남자는 전령 임무를 맡아 말을 달리던 중 포탄 파편에 관자놀이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담은 편지는, 정작 그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야 아내에게 닿았다. 그 애틋한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이 뒤늦은 편지에서 시작하게 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처럼 그의 예술은 끝내 당도하지 못한 어떤 미래를 향해 물음을 던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프란츠 마르크(1880∼1916). 바실리 칸딘스키, 아우구스트 마케 등과 더불어 ‘청기사파’를 주도하던 화가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마케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먼저, 그다음에는 마르크가 사망하고 말았다. 러시아 사람 칸딘스키는 목숨을 잃진 않았지만 적국 국민으로 분류돼 추방당했으니 이렇게 청기사의 가장 촉망받던 화가들은 각자의 운명을 달리하게 됐다.
청기사라는 이름의 내력을 칸딘스키는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마르크의 거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이름을 지었는데 두 사람 모두 파란색을 사랑했고 마르크는 말을, 자기는 기수를 사랑했으니 이름은 저절로 생겨났으며, 마르크의 아내가 끓여 준 커피는 더없이 맛있었다는 것이었다. 농담처럼 가벼운 이 회고 속에 청기사라는 이름의 두 축, 곧 정신의 색인 ‘파랑’과 돌파의 매개인 ‘말·기수’가 모두 들어 있다. 이 공명에서 청기사는 태어났다.
마르크가 푸른 색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푸른 말들을 보면 드러난다. 마치 종교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존재들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중 하나인 ‘푸른 말 I’(1911)은 작품명 그대로 파란 말이 주인공이다. 인간이 부리는 수단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말인데 그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다. 또한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푸른 말을 본 적이 없다. 푸른 색은 닿을 수 없는 하늘, 잡히지 않는 먼 바다의 색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에게 파랑은 무엇보다 정신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눈에 보이는 말의 빛깔이 아니라, 말이라는 존재가 품은 정신성을 그는 파랗게 칠했다. 이 단순하고도 대담한 결정 속에는, 보이는 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화폭으로 불러들이려는 마르크의 종교적이라 할 만한 열망이 응축돼 있다.
평생 찾은 ‘성스러움’…교회 아닌 자연·동물에 있다 믿어
1880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마르크의 아버지는 직업 풍경화가였고, 어머니는 신앙이 깊은 기독교 신자였다. 그림과 신앙, 이 두 혈통은 마르크의 작업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년 마르크가 처음 품은 뜻은 화가가 아니라 신학자였다.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을 공부하려 했고, 이내 철학으로 마음을 옮겼다가 1년의 병역을 마친 뒤인 1900년에야 뮌헨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마르크가 심취했던 신학과 철학은 형태를 바꿔 그의 그림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렇게 평생 그가 찾아 헤맨 것은 성스러움이었다. 교회 제단이 아니라 창조된 것들 자체, 곧 자연과 동물 속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물질적 진보의 소음이 정신의 자리를 밀어내던 세기 전환기 유럽에서 그는 반대편으로, 침묵하는 자연과 말 없는 동물에게로 걸어 들어갔다.
|
1911년 칸딘스키는 마르크에게 우리 시대 예술의 증언이 될 연감을 함께 펴내자고 제안했다. 여기서 20세기 미술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 중 하나인 ‘청기사 연감’이 나왔다. 그 정신은 분명했다. 아이들의 그림과 민속 판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조형물, 중세의 유리화와 동시대 전위회화를 위계 없이 나란히 놓으면서 예술의 진정한 근거가 형식이나 기교가 아닌 내적 필연성, 곧 정신적인 것에 있음을 선언했다. 국경도 시대도 신분도 넘어서는, 오직 내면의 필연으로만 연결되는 예술을 향한 젊은 기백이 거기 있었다. 역사와 세계를 아우르는 대범하고도 신선한 시각이었다.
청기사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작업실을 오가고, 각자 다른 기질과 화풍을 지녔으되 하나의 정신적 지향 아래 합을 맞추던 그 몇 해가 마르크에게는 가장 충만한 시절이었다. 1911년 뮌헨에서 청기사파의 첫 전시가, 이듬해 봄에는 두 번째 전시가 열렸고, ‘푸른 말 I’은 이 새로운 정신의 상징이 됐다.
마르크의 화면에서 동물과 풍경을 가르던 윤곽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12년 프랑스 여행 이후다. 이 시기에 마르크는 더 이상 자연의 상에 매달리지 않고 그 배후에 숨은 힘을 드러내기 위해 오히려 그 상을 부순다고 말했다. 이제 말은 배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체가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힘 속으로 녹아든다. ‘마구간’(1913)은 그 이행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구간’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색색의 기둥과 막대 사이로 말의 형상은 어렴풋이 나타났다가 이내 흩어진다. 평화로워야 할 마구간이 날카로운 빛의 축에 의해 갈라지고 동물의 몸은 충돌하는 색면 속에서 위태롭게 해체된다. 고요하고 명상적이던 초기의 푸른 말과 달리, 여기에는 뭔가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배어 있다. 안식처가 돼야 할 공간이 오히려 힘의 각축장으로 변한 그림에는, 곧 세계를 덮칠 파열의 전조가 어른거린다. 붉게 갈라지는 형태들 속에서 겁에 질린 동물들이 쓰러지고 자연의 통일은 더 이상 목가적인 조화가 아니라 세계 종말의 환영으로 나타난다. 훗날 전선에서 마르크는 ‘마구간’을 두고 “이 전쟁에 대한 예감이며 소름 끼치도록 충격적이어서 내가 그렸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렵다”고 아내에게 써 보내기도 했다. 그가 붓으로 미리 본 파국이 몇 해 뒤 그를 삼킬 참이었다.
1차대전 참전…독일 정부 예술가 보호조치 직전 목숨 잃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르크는 군에 자원했다. 이 지점에 가장 뼈아픈 아이러니가 있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가 그랬듯이 마르크도 이 전쟁을 병든 유럽을 씻어낼 정화의 불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물질의 붉음이 마침내 불타 사라지고 정신의 새 시대가 열리리라는 어리석은 소망은, 이내 현실의 참호 속에서 악몽으로 변해 갔다. 독일 정부는 뒤늦게 저명한 예술가들을 전투에서 빼내 보호하기로 하고 그 명단에 마르크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재배치 명령이 닿기 직전 그는 목숨을 잃었다.
|
오늘 우리가 마르크의 푸른 말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림 속 동물이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답을 완성하지 못한 채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편지가 그가 떠난 뒤에야 닿았듯 그의 푸른 말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어떤 약속처럼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