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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감독은 5일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외 취재진을 만나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가 된 소감과 함께 작업 철학, 한국 영화계의 현주소 등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놨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파트너사인 브랜드 샤넬과 협업해 까멜리아상을 제정했다. 까멜리아상은 여성 영화인들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으로, 다양한 영화 작업들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드높인 저명한 영화 제작자 및 업계 종사자들에게 수여한다. 부산의 시화이자 가브리엘 샤넬 여사가 가장 좋아했던 동백꽃의 의미를 담아 이름을 까멜리아상으로 지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올해 첫 수상자로 선정돼 지난 2일 개막식에서 상을 수여받았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괴물’, ‘피도 눈물도 없이’, ‘박쥐’, ‘고지전’, ‘국제시장’, ‘암살’, ‘헤어질 결심’ 등 다수 작품들의 미술을 책임지며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오늘날 한국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주역들 중 한 명이자, 성별을 뛰어넘어 세계를 무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류성희 감독은 미국 아메리칸영화연구소(AFI)에서 영화를 전공해 미국의 독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중, 돌연 한국으로 돌아가 2000년대 초부터 국내 장르 영화들을 작업하며 한국 영화의 부흥과 발전에 함께했다. 류 미술감독은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활동하던 자신이 한국행을 결심했을 당시 주변의 모두가 만류했었다고도 고백했다.
류 미술감독은 미국에서 일을 접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심한 계기를 묻자 “미국 AFI에서 공부를 했고. 이후 1년 정도 미국 독립영화계에 있었다. 당시 제가 서부 영화를 작은 걸 하나 맡게 됐는데 정말 힘들고 짧게 독립영화를 찍은 후 그날 밤 (한국에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그 영화가 사막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총을 거칠게 쏘다 죽어버리는 ‘건 맨’(Gun Men)들의 이야기였다. 정말로 힘들게 이 일을 했는데 처음으로 ‘현타’가 왔다”며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생각이 들었다. 사막 한복판에서 정말 죽을 정도로 열심히 세트를 찍었고, 동경해온 서구 문화에서 서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콜걸 같은 사람들이 나오던 영화를 찍을 때 완전히 깨달았다. ‘내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서양인들이 해온 걸 그대로 답습하며 비슷하게 하려 애쓰기보단 실패하더라도 해보지 않은 걸 위해 내 시간을 쓰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밤 ‘동발불패’ 같은 아시아 영화들을 봤다”고 털어놨다.
그는 “‘동방불패’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물이 돌아다니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세계를 그리고 역사를 만들고 우주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라며 “중성적 웃음소리, 술 한 모금 먹으며 상대와 대적하는 세계관이 멋져보였다”고 당시 ‘동방불패’를 보고 느꼈던 감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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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에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기 시작해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감독이 된 현재, 그는 오늘날 영화시장에서 여성의 입지가 크게 변화했음을 실감한다고도 털어놨다. 류 미술감독은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미술감독 중 여성은 한 분 정도였고 대부분이 남성들이었다. 당시 아는 사람이 한국에 아무도 없었기에 포트폴리오를 직접 만들어 유명하다고 하는 영화사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니며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당시 영화사들로부터 멜로나 로맨스 작품이 만약 들어가면 한 번 연락은 하겠다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아주 강력한 인식이 있던 게 창조적인 일, 창조적인 장르 영화는 남성의 영역이란 확고한 인식이 잡혀 있었다. 여자들은 예산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여성도 예술적일수는 있지만 기술 분야가 포함된 이 일을 여성들이 할 수 있을까 (당시의 인식이)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직업을 갖기 어려웠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 선입견을 깨기 위해선 일단 멜로부터 하고 보자 하진 않았다.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1년 반 정도 지내다 처음 시작했던 게 류승완 감독님 작품(‘피도 눈물도 없이’)이었다. 류 감독 소개로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님을 만났다”며 “모든 제작자가 날 거절했지만, 영화계 새로운 르네상스를 이끈 감독님들이 들어오면서 내게도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당시 이 산업에서 여성의 성공은 우연으로 여겨졌다. 그전에도 여류 감독님이 있었지만 그건 다 우연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여기서 앞으로 10년간은 (나의 성공이) 우연이라 여겨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장르 영화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종류의 장르 영화를 할 것이고 10년이 지나면 그때 다시 미국에 가겠다. 그렇게 10년 후 직은 작품이 ‘만추’다. 장르, 누아르 영화를 계속 고수하며 산업의 인식을 타파해야만 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