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트레코즈는 지난달 20일 공식 해산을 발표했다. 2010년 4월 20일 설립한 이후 꼭 12년째 되던 날이다. 1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 동안 한국 힙합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레이블이었기에 아쉬움의 목소리가 컸다.
하이라이트레코즈 해산 발표 후 레이블 설립자이자 대표 아티스트인 팔로알토(본명 전상현, Paloalto)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팔로알토는 레이블 해산 결정의 이유를 묻자 “하이라이트레코즈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이디어와 재정적인 면 모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각자 새로운 환경에서 음악을 하는 게 더 나은 능력치를 발휘하는 길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답했다.
-하이라이트레코즈 해산 결정을 내린 이유가 궁금하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는데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재정적 부분도 당연히 영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회사에 계약된 여러 신인 아티스트들에 대한 서포트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회사가 10년이 넘었다 보니 제작, 매니지먼트 등 여러 지점에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학습이 된 채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기도 했다. 레이블 내 아티스트들간의 크리에이티브한 시너지를 내는 부분이 최근 1, 2년간 부족했다고도 느꼈다. 이 가운데 레이블의 초창기 모습을 좋게 기억하는 분들이 아쉽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행보로는 그런 부분을 채워주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여파가 재정적 어려움에 영향을 미쳤나.
△“아무래도 코로나19가 컸다. 오프라인 행사로 꽤 많은 매출을 내던 회사였는데 공연이나 행사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어려움이 뒤따랐다. 너무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보니 신인 아티스트들의 경우 음원만 내서는 주목받기 어렵다. 공연이나 오프라인 이벤트를 통해 실력을 알려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웠다.”
-해산 결정을 내린 시점은 언제인가.
△“두 달여 전쯤이다. 회사 대표, 이사님, 그리고 허클베리피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레이블의 한계가 느껴지니 해산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렇게 이야기한 뒤 저는 투어 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그 사이 회사 직원들과 아티스트들에게 해산 결정에 대한 내용이 공유됐다.”
-아티스트들의 반응은 어땠나.
△“저마다 결정을 받아들이는 온도가 달랐다. 쿨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런 결정을 내리느냐는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었다. 대표직은 내려놓았지만 레이블에 남아있는 아티스트들을 모두 제가 영입했기에 그들과 한명 한명씩 만나 오해가 없도록 하며 멘탈 관리를 하는 데 2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가장 마지막으로 계약한 애쉬비의 경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거다. 애쉬비와는 만나서 5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하이라이트레코즈에는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아티스트들이 거쳐갔다. 설립 당시엔 GLV, 에이조쿠, 소울원 등 팔로알토가 속한 개화산 크루원들이 주축이었다. 이후 비프리, 오케이션, 키스에이프, 이보, G2, 스웨이디, 조원우, 요시, 윤비 등이 레이블을 거쳐갔고, 해산할 땐 허클베리피, 레디, 스월비, 오웰무드, 수비, 저드, 애쉬비 등이 레이블에 속해 있었다.
-설립 후 10년간 대표직을 맡으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6, 7년차쯤 됐을 처음 그린 이상향 그림과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갭을 줄이기 위해 나름 노력했는데 성공해내지 못한 것 같다. 규모도 커지고, 아티스트도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매출을 늘리는 데 집중해야 했고, 그렇다 보니 재미와 의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 같다.”
국내 힙합계에서 힙합 레이블이 1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한 사례는 손에 꼽는다. 힙합 레이블 하면 떠오르는 일리네어레코즈는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2020년 해산했고, 2013년 만들어진 AOMG는 아직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레코즈는 10년을 넘어 12년 동안 힙합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의미 있는 이정표들을 남겼다.
△“일단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남겼다는 점을 짚고 싶다. 설립 초창기에 100만원짜리 DSLR을 사서 모든 활동을 다 영상물로 남기고 유튜브 채널에 꾸준히 업로드했다. 당시엔 언더 힙합 아티스트들이 뮤직비디오를 잘 만들지 않았고, 만든다고 해도 힙합 바닥에 촬영이나 편집을 잘 하는 인력이 많지 않았기에 퀄리티의 수준이 높지 않은 때였다. 남들보다 일찍 영상 제작에 투자한 덕분에 좋은 퀄리티의 뮤직비디오를 많이 만들어냈다는 생각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2015년에 공개한 저의 ‘굿 타임즈’(Good Times) 뮤직비디오다. 당시 드론을 띄워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는데 ‘인디펜던트 레이블이 이 정도 퀄리티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라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로 좋은 평이 많았다.”
-2013년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 ‘Hi-Life’(하이-라이프)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레이블 단위 컴필레이션 앨범을 찾기 어려웠을 때 일찍 만들어냈다. 당시 세계적 힙합 트렌드가 바뀌고 있을 때다. 에이셉 라키, 드레이크, 왈레 등이 등장하면서 트랩 힙합이 대중화되면서 힙합 판도가 바뀌는 시기였다. 그 음악을 하이라이트레코즈 소속 아티스들이 빨리 받아들이고 완성도 있게 결과물을 뽑아낸 게 ‘Hi-Life’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그 앨범으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많은 분이 비프리가 앨범 프로듀싱을 주도했다고 알고 계시는데 저도 프로듀싱 부분에 있어 꽤 많은 지분이 있다. 비트를 모아서 들려주고 배분하고 녹음 받고 방향성을 정하는 하나하나에 제가 관여했다. 꽤나 많은 지분이 있는데 그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데 관한 개인적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놓는 시도 자체도 앞섰고, 음악도 앞섰기에 자부심이 있다.”
△“키스에이프의 ‘잊지마’ 같은 경우, 대중매체를 잘 타지 않은 힙합 레이블일 때였는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아냈다. 다시 미국의 데프 젬레코드를 비롯한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허클베리피의 공연 브랜드인 ‘분신’. 모두가 힘을 합쳐 올림픽홀에서 퀄리티 높은 공연을 여는 아티스트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또 스냅백과 의류를 처음 내놓앗을 때의 판매량도 대단했었다. 지금은 더 많이 파는 힙합 레이블이 많아졌지만, 힙합 레이블 중 한발 앞서 굿즈 판매를 성공시켰다는 생각이다. 주류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도 일찌감치 했다. 2018년 수제맥주 브랜드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와 컬레버레이션을 했었다.”
-CJ ENM과의 인수합병 부분은 어떤가. (하이라이트레코즈는 2015년 CJ ENM 서브 레이블로 편입됐다가 2019년 말 관계를 정리했다.)
△“인수합병도 당시엔 욕을 많이 먹었지만, 비지니스적인 부분에선 성공적인 행보였다는 생각이다. 대기업이 5년 밖에 안 된 영세한 힙합레이블의 가치를 인정하고 큰돈을 투자한 것이었으니 비지니스 적으로는 박수 받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힙합 팬들이나 음악 하는 사람들은 그런 케이스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라봤었다. 어떻게 보면 하이라이트는 ‘욕받이’였다. 우리의 사례가 있었기에 그 뒤로 CJ ENM 서브 레이블이 된 AOMG와 아메바컬쳐가 대처를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하나하나 언급해보니 하이라이트레코즈가 선도한 부분이 정말 많다.
△“10년 이상 안정적이고 단단하게 레이블을 운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늘 크리에이티브하게 움직이며 변화에 앞장서왔고, 로컬라이징을 잘 하면서 음악으로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생각이다.”
-하이라이트레코즈가 어떤 레이블로 기억되었으면 하나.
△“하이라이트레코즈의 12년 중 각자 좋아하는 시기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각자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대로 추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좋음 음악을 들려주고 이례적인 족적을 남긴 레이블로서 계속 회자되었으면 한다. 말 그대로 레거시를 남긴 레이블로.”
인터뷰②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