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가 올해 전작 ‘비공식작전’으로 유독 경쟁이 치열했던 여름 극장가에 이어 또 다른 극장가 성수기인 추석에 영화 ‘1947 보스톤’으로 연달아 작품을 선보이는 심정을 담담히 밝혔다.
하정우는 최근 영화 ‘1947 보스톤’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27일에 개봉한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과 가슴 벅찬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를 시작으로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 웨이’ 등 히트작들로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끌었던 강제규 감독이 ‘장수상회’ 이후 약 8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다.
하정우가 대한민국 마라톤 영웅 손기정을, 임시완이 ‘제2의 손기정’으로 불리던 손기정의 제자이자, 광복 후 처음 태극 마크를 달고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마라토너 ‘서윤복’ 등 실존 인물들을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하정우는 “2019년 촬영을 시작해 2020년 말 촬영을 끝냈던 작품이니 약 4년 만의 개봉이다. 올 여름부터 지금 일이 너무 많이 몰렸다”며 “영화 ‘로비’ 촬영도 지난 주(인터뷰 시점 기준) 시작해 전날까지 5회차를 찍었다. 7월달부터 사실상 쉬는 날이 없다”고 근황을 전했다.
지난 여름 ‘비공식작전’(감독 김성훈)에서 흙수저 외교관으로 관객들에게 모험과 감동을 선사했던 하정우가 이번 추석엔 마라톤 소재 영화로 돌아왔다. 데뷔 20주년. 지난 20년간 그의 연기 인생도 마라톤에 가까웠다. 여러 단역들을 거친 하정우는 2003년 영화 ‘마들렌’으로 데뷔했다. 이후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추격자’, ‘멋진 하루’, ‘황해’, ‘범죄와의 전쟁’, ‘베를린’, ‘아가씨’, ‘터널’, ‘신과 함께’,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굵직한 화제작들로 충무로를 든든히 받치는 톱배우가 되기까지 하정우는 쉼없이 달렸다. 하정우는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정우성과 이정재, 조은지 등 지금처럼 배우들이 영화감독에 도전하는 사례가 늘기 전, 하정우란 선례가 있었다. 하정우는 ‘롤러코스터’(2013)로 입봉해 ‘허삼관’(2015)까지 2개의 연출작을 보유 중이다. 최근 ‘1947 보스톤’ 개봉과 더불어 세 번째 연출작인 ‘로비’ 촬영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947 보스톤’은 대학 시절 연기자를 꿈꿨던 하정우의 로망을 뒤늦게 실현시켜준 작품이다. 하정우는 “강제규 감독님은 저희 대학교 선배님이셔서 신인 때부터 오며가며 자주 인사드렸다”며 “2003년쯤 압구정의 한 고깃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강 감독님과 연출부로 보이는 무리들이 영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난 한창 졸업해 오디션을 보러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기 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강제규 감독과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했다. 이어 “이후 ‘마이 웨이’ 때도 감독님이 언제 불러시지 않을까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1947 보스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드디어 왔구나’ 생각했다. 거의 15년 만에 꿈을 이룬 것”이라고 회상했다.
대한민국 실존 영웅 ‘손기정’을 연기하며 느낀 책임감과 준비과정도 털어놨다. 하정우는 “감독님과 유족, 재단분들로부터 생전 선생님의 모습이 어떠셨는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전해들었다”며 “감독님이 외적으로 손기정 선생님이 저랑 많이 닮았다고 말씀해주셨다. 처음엔 진짜 그런가 싶었는데 캐릭터를 준비하며 선생님의 사진, 영상 등을 계속 보니 내가 봐도 외적으로 비슷해보이는 지점들이 있더라”고 떠올렸다.
캐릭터 성격을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선 “손기정 선생님이 이북 분이신데 우리 집안 윗분들도 이북 출신이다. 큰아버지 등 집안 어르신들의 모습이 손기정 선생님 캐릭터에서 겹쳐보이더라. 그래서인지 캐릭터의 성격에 접근하는 과정도 비교적 수월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손기정의 당시 심정을 표현해내는 과정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고도 토로했다. 하정우는 “가슴에 일장기를 단 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을 받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길 강요받던 삶이셨다. 그러다 서윤복을 만나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출전시켜 어렵게 태극 마크를 달고 뛰게 하기까지 그 여정이 엄청나게 많은 갈등과 고난의 시간이셨을 것”이라며 “그 감정을 함부로 해석하고 표현하기 조심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감독님과 특히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라고 부연했다.
‘수리남’과 ‘비공식작전’에 이어 ‘1947 보스톤’에서도 빛난 하정우식 생존 영어 대사의 비하인드도 들려줬다. 하정우 특유의 친근한 생존 영어 대사와 애드리브는 작품의 긴장감을 해소하는 웃음 포인트로, 이 영화에서도 톡톡히 활약을 펼친다. 그는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읽으며 더 좋은 대사 표현이 없을지를 고민한다. 단어 하나로 천냥빚을 갚듯, 대사 한 마디가 주는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1947 보스톤’에 등장한 영어 대사도 애드리브였다”며 “대사를 고민해 감독님께 애드리브 검사를 받는 편이다. 영어를 쓰는 상황 자체는 작가님, 감독님들이 설정하시는데 신기하게도 우연이 겹친다”고 말했다.
올 여름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엔 실패한 ‘비공식작전’의 결과물에 대해선 전보다 훨씬 담담해진 모습이었다. 앞서 하정우는 지난달 주지훈과 함께 성시경의 웹예능 ‘먹을텐데’에 출연해 관련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비공식작전’의 저조한 박스오피스 성적을 향한 속상함과 애틋한 마음을 진솔히 전해 대중의 응원을 받았다.
하정우는 “속상한 마음을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지 않나. 시청자들이나 관객분들이나 저를 1, 2년 보신 것도 아니고 말이다”라면서도, “‘먹을텐데’ 나왔을 땐 저나 지훈이나 솔직한 심정이었다. 영화가 못났든 잘났든 배우에겐 모든 작품이 자신이 낳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당시 속상하고 답답했던 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상황이나 결과를 이해가 된 부분들이 있다”며 “얼마 전 ‘비공식작전’ 팀을 다시 만나 해단식 개념으로 모였다. 난 안 울었지만 다들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또 한 번 눈물 파이팅을 했다. 너무 오래 준비한 작품이기도 하고, 있는 파이팅 없는 파이팅 다 넣었으니 남다른 마음인 건 맞다”고 덧붙였다.
연출 및 제작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전했다. 하정우는 “이번 ‘로비’같은 경우는 대본 전체 리딩만 10번 정도 했다. 부분 리딩도 하고 배우들을 따로 만나 개별적으로 이야기도 나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기록해뒀다 시나리오에도 반영하는 편”이라고 본인의 연출 스타일을 귀띔했다.
이어 “마음은 제작과 연출도 연기하는 것만큼이나 왕성히 하고 싶다”며 “제작자나 감독 등 거창한 타이틀을 따고 싶어서라기보단 어떤 식으로든 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는 진심을 내보였다.
한편 ‘1947 보스톤’은 현재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