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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타인들’이란 저서를 쓴 이탈리아의 인지 심리학자 조반니 프라체토의 말이다.
영화 ‘#살아있다’(감독 조일형)는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살아있다’는 원인 불명의 증세로 공격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통제 불능에 빠진 도시의 풍경을 ‘아파트’란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 시작부터 곧장 본론에 진입한다. 밤 늦게까지 게임을 즐기며 유튜버를 꿈꾸는 평범한 청년 준우(유아인 분)는 어느날 늦은 아침 잠에서 일어나보니 집에 자신 혼자 있음을 깨닫는다. 부모님은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장을 보라’는 메모를 남겨놓은 채 외출을 했고, 준우는 어제와 같은 집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늘 그렇듯 물을 들이킨 채 다시 게임세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컴퓨터 속 사람들이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며 TV를 보고 밖을 보라 말한다. 준우는 이에 거실로 나가 TV를 켠 뒤 베란다 밖을 지켜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동네가 한순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문자를 끝으로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는 먹통이 되고 준우는 혼자가 된다. TV에서는 구조가 올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공허한 앵커의 외침만 들릴 뿐이다.
이 영화 속 생존자인 준우와 유빈(박신혜 분)은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고립되길 택하는 무력한 주인공들이다. 생존과 세계평화 등 대의(大義)를 위해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좀비들을 소탕하던 기존의 좀비물들과 이 영화가 가장 다른 지점이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어쩔 수 없이 고립된 일상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쪽을 택한다. 좀비를 소탕하거나 치유할 비책이 담긴 기술이나 무기, 탁월한 체력, 싸움기술 등 특출한 능력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좀비들을 치료할 방법이나 뚫고 나갈 무기를 쥐어주는 대신 좀비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립된 이들이 겪는 외로움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려 노력한다.
특히 준우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오히려 연명할 식량이 더는 없다는 것도, 늘 도사리는 좀비들의 위협도 아닌 ‘혼자’라는 외로움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을 것이란 지독한 외로움, 가족들이 돌아오는 환영에 시달리던 준우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던 순간 또 다른 생존자 유빈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간 텅 빈 집 쇼파에 술에 절은 채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준우가 위험을 무릅쓴 채 문 밖을 나선 건 유빈이 ‘함께’ 살아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빈은 어설픈 준우와 달리 집 안에 들이닥칠 좀비들을 막을 각종 함정을 설치하고, 하루 먹을 식수 용량까지 꼼꼼히 체크해둘 정도로 주도면밀하고 강인한 인물이다. 하지만 유빈마저 개인적인 아픔과 고뇌, 연약해진 마음을 애써 숨긴 채 이 고독한 삶을 버텨온 연약한 존재다. 유빈은 준우를 도왔지만 그 역시 준우가 있어서 집 밖을 벗어났고, 좀비들을 정면 돌파할 용기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런 연약하고 평범한 두 사람의 의기투합과 감정 변화는 장기화된 신종 코로나바이러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자가 격리와 생활 속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우리들에게 충분한 공감의 지점을 선사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 누군가와 단절된 채 멈춰진 일상을 보내야 한다는 준우의 감정선에 공감 돼 씁쓸해지다가도 유빈과 준우의 모습을 보며 ‘이 재난으로 인한 고립과 단절을 나만 겪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함께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나갈 이들이 살아숨쉬고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엉성하게 든 무기와 발길질로 좀비를 돌파해나가는 두 사람의 액션신은 어설프지만 현실적이어서 웃음이 나온다. 허술하지만 함께 좀비들을 해치우며 희망을 향해 달려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결국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이자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그럼에도 정통 좀비물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좀비 대신 좀비를 맞닥뜨린 주인공의 감정선에만 포커스를 맞추다보니 이 모든 사달을 낳은 좀비 바이러스 그 자체에 대한 서사가 부족하다. 굳이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꼭 좀비였어야 할 필요가 있나 의문도 든다.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