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 감독 “故홍기선 감독 끝까지 소신 지켜…영화 위해 개런티 낮췄다”(인터뷰)

박미애 기자I 2018.01.17 06:30:46

고 홍기선 감독 유작 `1급기밀` 후반 작업 맡아

고 홍기선 감독의 유작 ‘1급기밀’ 후반 작업을 한 이은 감독(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스타in 박미애 기자]영화 ‘1급기밀’은 지난 2016년 12월 작고한 고 홍기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다. 홍 감독은 촬영을 마치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전작인 ‘이태원 살인사건’(2009) 개봉 직후부터 이 영화를 준비했다. 고인의 마지막 고발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이 영화에 여러 손이 거들었다. 고인의 오랜 동료 이은 명필름 대표 겸 감독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영화의 후반 작업을 맡았다. 그리하여 ‘1급기밀’은 근 10년 만인 오는 24일 개봉을 앞뒀다.

이 감독은 15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중 “홍(기선) 감독님의 노력이 잘 살아야 할 텐데 중압감, 아니 책임감이 큽니다”고 말했다. 그는 편집과 컨펌만 했다면서 오롯이 홍 감독의 작품임을 강조했다. 2015년 리틀빅픽쳐스에서 배급을 맡기로 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는 그는 ‘1급기밀’은 쉽지 않은 소재에도 장르적 쾌감을 갖춘, 서사의 힘이 단단한 영화로 기억했다. 그는 “촬영 끝나고 ‘쫑파티’에서 홍 감독님을 뵀는데…”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홍 감독 사후 이 감독은 이 영화의 제작자 안훈찬 미인픽쳐스 대표와 최강혁 프로듀서, 투자자의 제안으로 후반 작품을 맡게 됐다.

“세 분이 오셔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데 홍 감독님이 안 계시니까 저한테 컨펌을 맡아 달라 하더군요. 촬영도 마쳤고 김상범 편집기사가 편집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은 아닐 것 같았어요. 그래서 (2017년) 6월부터 김상범 편집기사와 편집을 마무리 하고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이 감독이 ‘1급기밀’에 손을 보탠 데에는 홍 감독과 오랜 연에서 따른다. 두 사람은 1980년대 독립영화단체 ‘장산곶매’의 멤버였다. 장산곶매의 첫 영화로 당시에는 금기시된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는 고 홍기선 감독이 각본을 쓰고 이은 감독이 장동홍·장윤현 감독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다. ‘파업전야’(1990) ‘닫힌 교문을 열고’(1992) 등의 작품들도 발표됐다. 이후 홍 감독은 독립영화 판을 떠났다. 1992년 발표한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그의 충무로(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충무로로 옮긴 그는 ‘1급기밀’까지 네 편을 남겼다.

“작품 편수를 떠나서 홍 감독님은 한국영화계 리얼리즘의 소중한 감독 중 한 분입니다. 상업영화시장은, 특별한 경쟁력이 요구되잖아요.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것이 그런 시장에서 돈을 좆지 않고 일관되게 소신을 지키고 산다는 게 어려운데 홍 감독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러셨어요.”

새우잡이 배의 애환을 통해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그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는 프랑스 낭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진 세계 최장기 정치범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삶을 영화화한 ‘선택’(2003), 1997년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영화화한 ‘이태원 살인사건’(2009) 등 홍 감독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발하는 진보 성향의 감독으로 ‘한국의 켄 로치’로 불리기도 했다.

이은 감독(사진=신태현 기자)
고인의 유작인 ‘1급기밀’은 방산비리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도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97년 국방부 조달본부 외자부 군무원의 전투기 부품 납품 비리 폭로, 2002년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외압설 폭로, 2009년 군납문제를 폭로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모두 이명박 정부에서 진행된 것으로 민감한 소재 탓에 모태펀드에서 투자를 거부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어려움을 개인 투자자와 지역영상위원회의 도움으로 견뎌냈다. 배우들은 기꺼이 출연하고 몸값까지 낮췄다.

“배우들은 개런티를 안 받거나 덜 받거나 나중에 받겠다고 했어요. 주연을 연기한 김상경씨는 직접 투자를 했고요. 다들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의 힘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1급기밀’은 무거운 소재를 긴장감과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 끝에 느끼는 통쾌함은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실제 모델이자 실존 인물인 조주형 대령과 김영수 소령 등도 “속 시원하다”며 좋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감독이 연출에서 손을 놓은지도 20여년이 흘렀다. 그의 마지막 연출작은 임창정·고소영 주연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이다. 이 감독은 동료이자 아내인 심재명 대표와 함께 명필름을 이끌면서 현재 제작자로서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다. 연출에 복귀할 생각이 없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영화를 만들어서 선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나의 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제작자로 작품을 내는 것이 용이했지만 내가 안 하면 안 되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도 했다.

명필름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사 중 한 곳이다. ‘접속’(1997) ‘해피엔드’(1999) ‘섬’(2000) ‘공동경비구역 JSA’(2000)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바람난 가족’(2003)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마당을 나온 암탉’(2011) ‘두레소리’(2012) ‘건축학개론’(2012) ‘카트’(2014) 등 한국영화사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영화계 양극화 우려가 큰 현실에서 지난해 ‘아이캔스피크’를 성공시키며 ‘역시 명필름’을 증명해 보였다. 올해 역시 ‘환절기’ ‘당신의 부탁’ ‘박화영’ 등으로 명필름랩 출신들의 작지만 의미 있는 영화들을 선보인다. 또 내년에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규모 있는 영화도 선보일 예정이다.

“저와 심 대표는 명필름에서 작은 영화부터 큰 영화까지 ‘잘’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명필름이 생긴지 20여년이 됐는데 20년 40년,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좋은 회사가 되는 것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이은 감독(사진=신태현 기자)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