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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공]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고미영(41)씨가 11일 오후 6시(현지시각·한국시각 11일 오후 9시)쯤 히말라야에서 추락해 숨졌다. 세계 8000m 이상 14개봉 정복에 나선 고씨는 11번째 봉우리인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6m)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길이었다.
고씨가 소속된 코오롱스포츠는 "하산 도중 해발 6300m 지점의 '칼날 능선'에서 1000m 아래로 추락했다"고 12일 밝혔다. 고씨가 추락한 지 약 18시간 뒤인 12일 낮 12시쯤, 파키스탄 수색 헬기 2대가 캠프1을 약 100m 앞둔 해발 5300m 지점 눈밭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있는 고씨를 찾아냈다. 주(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은 이날 밤 "고씨가 이끄는 등반팀과 통화한 결과 고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고씨보다 4시간쯤 먼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던 오은선(블랙야크 소속·43)씨는 이날 오후 본지와의 위성전화 통화에서 "캠프4(해발 7500m)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 고씨와 마주쳐 '잘하라'고 격려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라이벌이자 후배를 잃은 오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라이벌'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산을 사랑하는 동료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 시즌에 히말라야 3개봉을 오른 건 (고씨가) 처음일 거예요.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의지가 강한 후배였어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직후 추락 소식을 듣고 숨이 막혔어요."
전 세계 여성 산악인 중 처음으로 8000m급 14개 봉을 완등하는 대기록을 세우는 것이 고씨의 꿈이었다. 낭가파르바트를 포함해 12개봉을 정복한 오씨와는 같은 꿈을 꾸는 후배이자 경쟁자 관계였다. 지난 10일 4시간 차이를 두고 각각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지만, 불의의 사고로 고씨의 꿈은 11번째 봉 낭가파르바트에서 끝나고 말았다.
오씨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 꼽히는 고씨는 앞서 지난 10일 오전 2시30분쯤 캠프4를 출발했다. 15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정상에 오른 고씨는 이날 오후 5시30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보냈다.
"존경하는 전설적인 산악인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라 감격스럽습니다. 남은 3개봉도 안전하게 등정해 대한민국 여성의 기상을 전 세계에 떨치겠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낭가파르바트는 제트기류와 눈보라로 하산하는 고씨의 발목을 잡았다. 기상악화로 악전고투를 벌이던 고씨는 해가 저문 뒤 해발 7700m 지점에서 베이스캠프로 지원을 요청했다.
한발 앞서 하산 중이던 오씨가 오스트레일리아·독일·캐나다 산악인으로 구성된 다국적 등반대 '내셔널 팀'을 통해 산소통과 보조 자일, 따뜻한 물 등을 고씨에게 올려 보냈다. 고씨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11일 새벽 6시쯤 캠프4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다시 하산하기 시작한 고씨는 11일 오후 6~7시쯤 캠프2(해발 6200m)를 100m쯤 앞둔 칼날 능선에 도달했다. 낙석과 눈사태가 잦고,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고정 로프가 전혀 없는 구간이 약 10m쯤 계속되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고씨는 설산(雪山)의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지인들은 고씨가 유쾌하고 씩씩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독하게 이를 악무는 '철녀(鐵女)'이기도 했다. 고씨는 2006년 10월 히말라야 초오유(해발 8201m) 등정을 시작으로 고산 등반에 뛰어들어 8000m급 고봉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올 들어 히말라야 마칼루(5월 1일), 칸첸중가(5월 18일), 다울라기리(6월 8일)를 한 시즌에 정복하는 '근성'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