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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의 부재는 분명 뼈아픈 현실이지만 이를 곧바로 한국 영화의 경쟁력 상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올해 한국 영화는 국내 흥행과는 별개로 해외 영화제를 중심으로 꾸준한 존재감을 유지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공개됐고,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첫선을 보였다. 홍상수 감독의 ‘그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역시 베를린 등 유럽 주요 영화제 초청을 통해 한국 영화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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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올해 한국 영화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국내 극장 흥행에서는 힘을 잃었지만 창작 경쟁력과 국제적 신뢰는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극장 매출 회복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제 성과와 내수 시장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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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극장가의 흥행 흐름은 실사 영화보다 애니메이션 지적재산권(IP)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이는 일시적인 장르 유행이 아니라, 관객 구성과 소비 방식의 변화가 본격화됐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판 더 라스트 어택’(94만 명)을 시작으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569만 명),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343만 명)으로 이어진 작품들은 두터운 팬덤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관객 동원을 이뤄냈다. 과거 서브컬처로 인식되던 애니메이션 장르가 이제는 극장 흥행을 떠받치는 핵심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 사례다.
이 흐름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에서도 확장됐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을 소재로 넷플릭스 전 세계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것은 물론, 싱어롱 상영이라는 이벤트형 포맷을 통해 극장 관람 수요까지 끌어냈다. 이는 콘텐츠의 완성도보다 관객의 참여 경험이 흥행을 좌우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말 극장가의 정점을 찍은 작품은 디즈니의 ‘주토피아2’였다. 이 작품은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국내 최고 흥행작에 올랐고, 가족 관객과 팬덤, 반복 관람 수요를 동시에 흡수하며 극장 산업이 선호하는 흥행 모델을 구현했다. 실사 영화가 담당해왔던 흥행의 중심축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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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과 관객 수 지표가 전반적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한국 영화계에서는 산업의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실험적 시도가 이어졌다. 이는 단기 성과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남겼다.
제작비 약 2억 원 규모의 저예산 영화 ‘얼굴’은 대형 자본 중심의 제작 구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저예산 영화가 다시 하나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상영 포맷 측면에서는 영화인과 극장, 기업이 협업한 30분 이내의 ‘스낵 무비’ 포맷이 등장하며, 짧은 러닝타임에 익숙해진 관객을 극장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기술을 활용한 변화도 감지됐다. 국내 최초의 인공지능(AI) 장편 영화로 소개된 ‘중간계’는 평가가 엇갈렸지만, 제작 과정에 AI 기술을 본격 도입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는 향후 제작비 절감과 제작 공정 변화 등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시험한 사례로 평가된다.
영화배급사 관계자는 “이 같은 시도들은 당장의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영화가 침체 속에서도 새로운 제작 방식과 상영 모델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천만 영화가 사라진 시대에 한국 영화의 생존 방식을 둘러싼 질문이 본격화된 한 해였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