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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의 낭군님’은 기억을 잃은 왕세자 원득/이율(도경수 분)과 신분을 숨긴 원녀 홍심/윤이서(남지현 분)의 로맨스다. 배우들의 호연과 탄탄한 대본, 아름다운 영상에 힘입어 자체 최고 14.4%(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전국 가구 기준)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도깨비’, ‘응답하라 1988’, ‘미스터 션샤인’을 잇는 역대 tvN 드라마 시청률 TOP4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시청률 보릿고개라는 요즘, 그것도 가장 치열한 월화 시간대에 이룬 ‘기적’이었다.
노 작가는 모든 공을 배우와 스태프, 시청자에게 돌렸다. 특히 주인공인 도경수와 남지현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담담하면서도 담대한 면모에 놀랐다”고 말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제작비 등을 이유로 사극을 기피하는 요즘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뜻을 꺾지 않은 건 “재미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백일의 낭군님’은 첩보물인 ‘본’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본’ 시리즈는 노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전에는 다른 사람 입맛에 맞추는 게 중요했어요. 어떻게 써야 편성이 통과가 될까 생각했죠.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재미있는 것’은 후순위였어요. 이번에는 ‘내가 뭘 써야 재미있지’라는 생각만 했어요. 만드는 사람부터 숙제처럼 작품을 만들면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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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의 낭군님’은 정통 사극이 아니다. 얽매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고 애드리브가 많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영감(안석환 분)의 ‘개놈아~’와 아전(이준혁 분)의 ‘갱쟁하네’는 배우의 역량으로 재해석된 대사다. 준혁 씨는 출연을 결정하고 충청도를 찾아가 사투리를 배웠다고 하더라. 전체 대본리딩하는 날 ‘갱장하네’를 구사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20분 동안 쉬지 않고 웃어서 토할 뻔했다. 개인적으론 13화 엔딩에서 원득이 홍심에게 “나다 팔푼이”라고 말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좋았다. 집필을 마친 후 뿌듯했다. 방송에서도 경수 씨가 잘 살려줬다. 확 와 닿았다. ‘나만 불편한가’라는 대사는 피나는 회의의 결과물이다. 보조작가 2명과 함께 일했다. 핵심 대사는 파란색으로 표시해놓은 뒤 촬영 직전 막판까지 수십 개의 후보 중에 고민해서 다수결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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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까지 집필 한 시점에서 분량 조절 때문에 1회부터 3회까지를 4회로 늘려야했다.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는데 때문에 처음에 생각했던 엔딩 포인트가 다 엇나갔다. 초고에는 궁과 송주현이 회당 1:1 비율로 진행되는데, 재배치하면서 달라졌다. 보통 1회에서 4회까지 작가의 모든 공력을 쏟아 붓는다고 한다. 근데 그게 다 어그러져 심란했다. 특히 3회는 남녀 주인공이 멍석에 말린 채로 끝난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의도한 장면은 모니터할 때 냉정하게 보게 된다. 그렇지만 원득의 낫질신이나, 이름을 찾으면서 ‘이적?’이라고 되묻는 장면은 예상 못했다. 감독님과 배우가 살린 장면이다.
―‘생일 축하혀~’ 노래가 나온 생일 잔치신도 사극에서 보기 드문 장면인데 유쾌한 신으로 남아있다.
△시청자들이 황당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걱정이 컸다.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송주현 장면을 쓸 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한 번에 써내려 갈 때가 많았다. 궁 장면에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밝은 신을 쓸 땐 쓰는 사람도 즐거우니까 즐겁게 써내려갔다면 심각한 신에선 함께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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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팬이다. 정조가 일기를 열심히 썼다고 하더라. 율이 일기를 쓰는 설정이 들어간 이유다. 그렇게 열심히 쓴 일기가 허무하게 없어지는 게 아깝다 생각했다. 회수 차원에서 들어갔다. 저도 일기를 매일 쓴다. 날마다 스스로 반성하고 칭찬한다. 일기는 좋은 것이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섬세한 남성 캐릭터라는 설정도 요즘 시청자 요구와 맞닿아 있었다.
△적어도 ‘민폐 여주’는 만들지 말자는 분명한 원칙이 이었다. 여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면 남자 주인공을 멋있게 그릴 수 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 순간 고민했다. 원득이가 “여자 일, 남자 일을 나눌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대사를 한다. 그런 고민에서 나온 대사들이다. 무엇보다 폭력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은 저부터 싫어한다.
―갈등의 빠른 해결도 장점이었다. ‘고구마 포비아’란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웃음) 제 성격이 그렇다.
―앞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늘 열심히 했는데 이번에 결과가 유난히 좋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전작(SBS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2014)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다. 건강도 나빠졌다. 다시 글을 쓸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블루베리 농장을 하는 친구의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보냈다. 전작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딱 하나다. 전에는 다른 사람 입맛에 맞추는 게 중요했다. 어떻게 써야 통과가 될까, 뭘 써야 편성을 잡을까 생각했다.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내가 재미있는 것’은 후순위였다. 이번에는 ‘내가 뭘 써야 재미있지’라는 생각만 했다. 만드는 사람부터 숙제처럼 작품을 만들면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미디를 원 없이 넣을 수 있었다.
―‘백일의 낭군님’을 통해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선한 사람들의 선한 영향력이 시청자의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다. 율의 진심이 조금씩 전이돼 인물들이 변한다. 율은 칼로 복수하지 않는다. 그의 진정성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 주변에서 ‘따뜻한 정서’가 제 장점이라고 해주시더라. 제 성향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결심한 건 있다. 코미디는 계속 이어가고 싶다. ‘백일의 낭군님’이 좋은 성과를 얻어 감사하고 기쁘다. 그렇다고 또 부담에 파묻히면 예전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차기작 또한 ‘백일의 낭군님’처럼 저부터 신나고 즐겁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열심히 찾아보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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