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서울대를 찾아 한국의 수출 주도 성장 모델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진단하며 경제 체제의 대전환을 주문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분절되고 인공지능(AI)이 산업과 경제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상황에서 기존 성장 방정식으로는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미·중 패권경젱이 韓 성장모델 흔들어
최 회장은 5일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중앙홀에서 경제학부 대상 특강에서 전통적인 경제학 모형이 디지털 경제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을 전제로 경제활동이 이뤄졌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기업과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거래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디지털 이코노미에서는 일대일 관계가 나타난다”며 “더 이상 시장이 없다”고 했다.
AI 확산에 따른 양극화와 미·중 패권 경쟁도 한국 경제의 기존 성장 모델을 흔드는 요인으로 꼽았다. AI 투자와 기술 발전의 성과가 산업 전반에 고르게 퍼지기보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격차를 벌리는 K자형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이 공급망을 분리하면서 각국에 어느 쪽에 참여할지 선택을 요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 기조까지 더해져 자유무역을 전제로 한 수출 전략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진단했다.
특히 최 회장은 AI 산업에 막대한 자본이 집중되는 상황에 주목했다. 미국과 중국이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AI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면서 반도체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에너지 수요도 급증하고 있어서다. 그는 “AI에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실제로 나올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면서도 “참여자 모두가 지지 않기 위해 투자를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AI 투자가 위축될 경우를 가정해선 “1930년대 대공황을 방불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최 회장은 이 같은 대내외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새로운 자본주의 설계다.기존에는 민간이 세금을 내면 정부가 이를 재원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구조였지만,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문제에 정부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사회문제 해결을 통해 창출한 가치를 측정하고 기여한 만큼 세금을 환급하는 ‘네거티브 택스’를 제안했다. 그는 “사회에 기여한 만큼 이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는 AI 네이티브 국가 구축 속도가 향후 대한민국 성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했다. 단순히 국민과 기업에 AI 사용을 확산하는 수준을 넘어 노동과 교육, 제도 등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 자체를 AI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AI 경쟁력의 핵심으로 실제 생활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꼽았다. 그는 “우리의 성장 모델을 AI에 얼마나 빨리 맞출 수 있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AI 대전환을 위한 방안으로는 한·일 경제 협력을 제안했다. 그는 현재 2조 달러 수준인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과 경제권을 통합하면 6조 달러로 커진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규모는 3배가 커지겠지만 그 효과는 세 배가 아니라 열배쯤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양국이 유사하게 겪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사회 복지 부담도 경제규모 확대로 완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 성장을 위한 인센티브 체계 개편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는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며 “현행 제도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면 새로운 규제를 적용받고 기존 지원이 끊겨 성장 동기 자체가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성장한 기업에도 기존 혜택을 유지하고 추가 지원을 제공해야 대기업이 늘어나고 성장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 회장은 경제성장이 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성장 동력이 약화하면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성장이 돌아가지 않으면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다”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가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