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윤지 성주원 기자] 지난 2월 ‘에픽 퓨리(Operation Epic Fury)’ 작전으로 촉발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냉전 이후 유지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공식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전문가들은 미국 중심의 질서인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해체되고 자국 우선주의와 실리 위주의 ‘다극화’를 넘어 ‘무극화’ 시대로의 전환을 앞당길 것으로 내다봤다. 각국이 생존을 위해 에너지, 안보 등을 재설계하는 등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안보 환경 자체도 달라졌다는 평가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공동의 적은 이제 사라졌다”며 “한국은 주한미군의 힘을 빌리고 미국은 전략적 유연성의 거점으로써 한국을 활용하는 등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의 시대다. K팝, K방산 등 경쟁력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다”고 제언했다.
|
이란전은 그나마 남아 있던 타협과 외교의 국제질서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수형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은 “그동안 자유주의 국제질서 또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구성해 왔던 주요 구성 요소인 동맹, 개방적 경제체제, 국제규범과 관습, 국제법,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 걸친 국제기구나 제도 등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가장 즉각적인 변화는 해상 질서에서 나타났다. 세계 에너지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이 물리적으로 봉쇄되면서 수십 년간 국제 해양 질서를 지탱해온 ‘항행의 자유’ 원칙은 무력화됐다. 이수형 부회장은 “앞으로의 국제정세는 강대국의 강압과 무력적 힘이 중시되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세 흐름과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안보를 의존해 왔던 주요 동맹국이 자강력을 중시하는 전략적 자율성 모색으로 바뀔 것이다”며 “이를 강화하고자 하는 흐름이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란전 이후 강대국과 전략적 자율성의 복합적 국제정세에서 미국과 중국 간 강대국 경쟁 양상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 산하 ‘스코크로프트 중동 안보 이니셔티브’의 제프리 시미노·배리 파벨 연구원은 “이란 전쟁 이후 지정학적 시나리오 중 미국이 이란전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상당한 수준의 간접 개입에 나서는 게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물밑에서 이란을 지원해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한다면 무극화 흐름이 더욱 심화하는 것이다.
조한범 석좌연구위원은 “이란 전쟁으로 ‘무극화’ 시대는 더욱 가속할 것이다. 다극화가 힘을 가진 여러 나라가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면 무극화는 패권국이 질서를 지킬 의지도 능력도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며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 이란 전쟁이 대표적이다”고 평가했다.
“이란 전쟁은 시스템 전쟁…기술도 분절화”
에너지와 금융 패권 역시 요동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원유 수입이 차단된 아시아와 유럽이 미국산 원유와 LNG(액체천연가스)로 급격히 눈을 돌렸고 전쟁 여파로 에너지 결제 수단이 다변화하면서 위안화 등의 거래 비중이 확대됐다. 이는 공고했던 달러 패권에 실질적인 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급등한 유가와 인플레이션은 글로벌 금리 기조를 흔들며 각국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강요하고 있다.
전통적인 동맹 체제에도 지각변동이 감지된다. 미국의 강경한 대이란 정책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며 갈등이 표면화한 유럽과 나토(NATO) 내부의 결속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란 전쟁을 네트워크·공급망·디지털 인프라까지 포함한 ‘시스템 전쟁’이라고 규정한 분석도 나온다. 비영리 연구기관 국제거버넌스혁신센터(CIGI)의 S. 야시 칼라시 연구원은 “이번 전쟁으로 글로벌 기술질서 또한 분절화·정치화가 가속할 것이다”고 내다봤다. 이란전 이후 긴장이 군사와 에너지뿐만 아니라 반도체, 클라우드 해저케이블, 인공지능(AI) 인프라를 둘러싼 기술 주권 경쟁으로 확장할 것이란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