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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은둔책방’의 선반 한 켠. 주인인 박석원 대표가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남긴 메모다. 책장 곳곳에 붙어 있는 짧은 추천 글들 사이에서 눈에 띈 문장이었다. “일본어로 책은 ‘혼(本)’, 음악은 ‘네(音)’라고 하는데요. 이 둘을 합치면 혼네(本音), ‘속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보다 낭만적인 결합이 있을까요?” 에세이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음악’ 앞에 붙여둔 말도 인상적이었다.
짧은 글귀에서도 박 대표의 사유가 드러났다. 어떤 분위기의 글을 좋아하는지, 그가 무엇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묻자, 박 대표는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 등을 꺼내 놓았다. 그는 책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오랫동안 곱씹어 온 문장들과 생각에 관해 이야기했다.
짙은 회색으로 칠한 은둔책방의 한쪽에는 큰 유리창이 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창밖으로 동네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점 앞 골목에선 하교한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뛰어놀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든 어르신들도 여럿 지나갔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주민은 유리창 밖에서 진열된 책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은둔’이라는 이름과 함께 놓기에는 어딘가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는 평범하고 평온한 풍경이었다.
책방을 운영하는 박 대표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규칙적인 생활이 잘 맞아 직업 군인을 목표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역 후엔 라디오 작가와 DJ를 거쳐 지금은 방송국 YTN의 앵커로 일하고 있다. 박 대표는 사람들 앞에 서는 직업을 가졌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 ‘은둔’하는 것을 즐기지만, 여유가 생길 때면 독서 모임과 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조용히 숨어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다시 세상과 연결되려는 마음이 한 공간 안에 함께 놓여 있었다.
10여 년 전 박 대표의 좌우명은 ‘급시우(及時雨)’였다. 중국 명나라의 소설 ‘수호전’ 속 주인공 ‘송강’의 별호로 ‘필요할 때 내리는 단비’라는 뜻이다. “어리고 호기롭던 시절의 신조였어요.” 오랜만에 그 단어를 들었다는 박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은둔책방과 닮은 구석이 있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은둔책방도 필요한 순간 잠시 들러 마음을 다듬고 가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각자의 고요를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곳. 박 대표는 은둔책방에서 만난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아, 어느 순간 조용한 변화를 만들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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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은평구에 오래 살아서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젊은 층보다는 노령 인구가 많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작업실처럼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다.(웃음) 그런데 예상보다 젊은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알고 보니 주변에 청년 임대주택이 많이 생겼더라. 청년들과 독서 모임도 하고, 글쓰기도 같이 한다. 출판도 시작했다. 매년 한 권 정도 만든다. 가장 최근 나온 책은 글쓰기 모임에서 나온 원고들을 엮은 것이다. 내 글도 들어가 있고, 디자인과 교열도 직접 했다. 손님들도 자신의 글이 책이 되는 경험을 좋아해 주었다.
-직업 군인을 준비하다가 라디오 작가와 DJ를 거쳐 앵커가 됐다. 지금은 책방도 운영한다. 삶의 방향이 계속 달라져 온 셈이다.
△학군단 출신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해 군대도 체질에 잘 맞았다. 군사학도 흥미로웠고, 아침에는 운동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식사하고 취침하는 생활도 괜찮았다. 그런데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복무하면서 내가 정말 원했던 삶에 대해 생각하며 다른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 아무래도 군인은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때로는 가족들의 얼굴도 쉽게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원래 책과 활자를 좋아했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어서 작가를 꿈꿨다. 라디오 작가이자 DJ로 일하던 중 선배들의 권유로 방송국 앵커로 전직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직업은 여러 번 달라졌지만, 중심에는 늘 같은 고민이 있었다. 좋아하는 책과 글쓰기를 어떻게 삶의 일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서점은 언제부터 열고 싶다고 생각했나?
△사실 10년 전쯤 이미 ‘은둔책방’이라는 이름으로 서점을 열 계획이 있었다. 당시에는 서촌 골목 안 작은 공간을 봐 두었다. 숨어 있는 듯한 공간의 느낌이 좋았다. ‘은둔해 있는 책방’이라는 뜻으로 ‘은둔책방’이라는 이름도 정해뒀다. 구두계약만 하고 공사에 들어간 시점에 건물주가 계약을 취소하면서 무산됐다. 그렇게 10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이름으로 지금의 서점을 열게 된 셈이다.
-사람들 앞에 서는 앵커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다니. 의외의 면모다.
△러닝도 새벽에 혼자 한다. 헬스장에서도 단체 운동은 잘 안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채우는 편이다. 책방 모임이나 행사에서는 그동안 비축해 둔 에너지를 쓴다. 그 소진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서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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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에서 책 한 권 읽고 나오는 것이 나에게는 은둔의 시간이다.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기도 하다. 동물들도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들어가 회복하지 않나. 사람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만의 동굴이 있다고 느낀다. 은둔책방이 숨고 싶을 때, 치유하고 싶을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공간 인테리어도 은둔하기 좋은 동굴을 닮았다.
△벽면에 기대 둔 서가는 서울 중구 황학동 시장에서 사 온 오래된 문으로 만들었다. 창가 테이블도 같은 곳에서 구한 문에 재봉틀 다리를 붙여 제작한 거다. 전체적으로는 동굴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진회색 페인트를 칠하고 벽면도 거칠게 마감했다. 그렇다고 답답한 공간을 원하진 않았다. 바 테이블 외에 책장 앞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정도만 두었다. 일반적인 서점 기준에서는 비효율적인 구성이다. 그런데 그게 이 공간에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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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술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위스키 한 모금씩 곁들이면 좋다. 예전에 술을 한창 좋아했었다. 책과 술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조용한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즐겼다. 지금은 예전만큼 마시지는 않는다. 시집을 읽을 때는 위스키가 어울리고, 에세이는 소주와 잘 맞는 느낌이 있다.
-혼자 있을 때는 주로 어떤 책을 읽나?
△에세이나 시를 많이 읽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편하게 활자를 즐길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서사를 따라가기보다 문장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읽는다. 이완되는 느낌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밑줄을 치고. 반면 소설은 함께 이야기할 때 재미가 더 커진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위해 읽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감상을 나누는 과정이 좋다.
-최근 독서 모임에서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읽었다고. 책 선정 기준이 따로 있나.
△지인들과 하는 모임에서는 책의 장르를 크게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서점에서 여는 독서 모임은 가능하면 고전이나 근대문학 위주로 고른다. 그중에서도 관련 논문이나 평론이 충분히 쌓인 책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미리 다양한 해석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를 정리해 그 책을 고르는 책방 손님들에게 함께 전달한다. 책이 어렵게 느껴질 때 어디를 중심으로 다시 읽으면 좋을지도 안내한다. 일종의 독서 레시피 같은 셈이다. 이런 준비들이 모임 진행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회사 일이 바쁠 때는 자주 열지 못한다.(웃음)
-‘은둔’을 말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음악회와 독서 모임처럼 사람을 연결하는 일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은둔책방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마케팅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좋은 콘텐츠를 함께 나누며 잠시 쉬어가라는 뜻으로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연다. 10년 전 책방을 하려고 했던 계기 중 하나가 책과 음악을 동시에 즐기고 싶어서였다. 옛날 노래는 가사가 정말 좋다. 그 좋은 가사를 잘 어울리는 책과 함께 감상하면 시너지가 좋다고 느꼈다. 그래서 은둔책방에서 ‘김광석 콘서트’를 열었다. 손님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미리 받아두고, 그 문장과 어울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매치했다. 곡을 연주할 인디 밴드도 초청했고. 지난 콘서트를 연 날에는 비가 내렸다. 파전과 막걸리를 곁들였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던 손님들도 있었다. 음악과 책이 겹치는 순간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는 느낌이었다. 올해도 6월쯤 다시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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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와 같은 책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잠시 멈추거나 샛길로 빠져도 괜찮다고 말해 준다. 책 한 권과 문장 하나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일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빛이 드리우는 순간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 서점 창가에도 붙어 있는 문장인데, 책방을 처음 열었을 때의 다짐이기도 하다. 꼭 거창한 변화가 아니어도 괜찮다.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각자의 삶에 고요한 변화를 하나쯤 품고 돌아가면 좋겠다.
-샛길로 빠져도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늘 다른 방향의 삶도 고민하는 것 같다.
△개인적인 목표가 귀농과 귀어다. 늘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조금 한가롭게 들릴 수 있지만, 언젠가는 욕심 없이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다. 어릴 때 목장을 하시던 할아버지 곁에서 자란 기억도 영향이 큰 것 같다. 지방 소도시에 은둔책방 2호점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서 내년 초쯤 북스테이 형태로 열 예정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은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책 읽다가 쉬고, 자연 속에서 고요히 머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손님들이 특히 많이 찾는 책이 있나?
△운영 초창기에는 독립 출판물 중심으로 큐레이션 했다. 그런데 단골이 생기면서 직접 읽고 고른 책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분들이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서점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책들이 잘 팔린다. 특히 20대 초반 손님들이 철학 책을 많이 찾는다. 책에서 효용을 찾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생각한다. 불안함을 느낀다면 불안 심리에 관한 병리학적으로 접근한 책을 읽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에세이를 읽는 식으로. 자기 불안이나 삶의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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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주 작가의 ‘술의 주성분은 낭만’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어렵지는 않다. 제목 그대로 오늘도 술을 마시고 내일도 술을 마시지만, 결국 그 안에는 낭만이 있다는 이야기다. 은둔책방 역시 술을 곁들이며 책을 읽는 공간이고, 나 역시 조용한 술집에서 책 읽는 시간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곳의 분위기와도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손지현 작가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바람이 부는>도 아끼는 책이다. 출간 직후 가장 먼저 입고된 곳이 이 책방이었다. 독립 출판물의 경우엔 입고가 되면 작가에게 알림 문자가 간다. 그 인연으로 함께 글쓰기 모임도 하게 됐다. 봄 날씨에 특히 잘 어울리는 책이라 처음 오는 손님들에게 자주 권한다.
-앞으로 은둔책방이 어떤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나.
△누군가 여기 와서 책을 읽고, 문장 하나라도 마음에 품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은둔’을 통한 가장 큰 효용이라고 생각한다. 그 한 문장이 언젠가 삶의 선택이나 변화에 조용히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큰 위로가 아니어도 괜찮다. 좋은 문장을 은둔책방에서 만났다는 기억 정도만 남으면 충분하다. 그런 조용한 성찰을 건네는 공간이 되고 싶다.
■은둔책방
박석원 앵커가 운영하는 독립 서점. 서울 은평구 역촌동의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다. 시·에세이를 중심으로 직접 큐레이션한 책을 소개한다. 위스키와 커피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독서 모임과 음악회, 글쓰기 모임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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