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어느 진영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성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원자력계는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과정에서 ‘탈원전 충격’을 경험한 바 있다. 2022년 ‘원전 강국’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으나 거야의 견제와 이후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사실상 ‘3년 천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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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차 전기본 사실상 확정…원전-신재생 ‘타협’
미래 무탄소 에너지원의 두 유력 후보인 원자력과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등)는 정국 혼란 속 일단 타협을 택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19일 전체회의에서 계엄·탄핵 정국 여파로 미뤄뒀던 산업통상자원부의 15개년(2024~2038년) 법정 계획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의 보고를 받으며, 사실상 이를 확정했다.
원자력계로선 불만과 안도가 공존할 만한 결과다. 대형 원전 3기 신설 계획 중 1기가 줄어든 건 아쉽다. 그러나 앞서 탈원전 정책을 펼쳤던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정국 속에서 원전 2기 신설에 더해 차세대 원전인 소형 모듈 원자로(SMR) 4개 묶음 신설 계획을 확정한 건 성과로도 볼 수 있다.
지난해 국내 전력 공급의 32.5%를 도맡으며 2006년 이후 18년 만에 최대 에너지원으로 복귀한 원전은 11차 전기본 계획에 따라 13년 후인 2038년에도 35.2%의 지분을 확보하며 최대 에너지원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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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가스(열병합)도 무탄소 에너지원으로의 전환 시간을 벌었다. 그 비중은 석탄(26.8→10.1%)과 가스(26.8%→10.6%) 모두 드라마틱하게 줄어들 예정이지만, 청정 수소·암모니아를 섞어 쓰는 형태로 그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게 됐다. 11차 전기본은 2038년까지 청정 수소·암모니아 발전 비중을 6.2%까지 늘리기로 했다. 대부분은 석탄·가스에 일정 비중을 섞는 혼소 발전 개념이다.
때마침 원전업계의 50여년 묵은 과제인 사용 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 문제도 국회의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 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신·재생 발전량 확대의 기반이 될 해상풍력 보급 특별법도 이와 함께 묶여 이르면 이달 중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미래 주류 무탄소 에너지원이 되려는 에너지원 간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미 늦어진 11차 전기본에선 타협이 이뤄졌지만, 이 법정계획의 실제 수명은 2년도 안 된다. 전기본은 2년마다 수립하므로 곧 12차 전기본 수립에 착수하게 된다. 조기 대선을 전제로 이를 주도하는 건 차기 정부의 몫이다. 조기 대선의 승자는 정치권력을 쥐는 동시에 미래 에너지원을 결정하는 책무도 부여된다.
◇부족분은 ‘공란’으로…이제부터가 진검 승부
무대는 마련됐다. 정부와 국회의 논의 과정에서 원전 1기 건설 계획이 취소됐지만, 그 자리를 다른 에너지원으로 메우는 대신 사실상 ‘공란’으로 비워뒀다. 11차 전기본은 2038년에 필요할 157.8기가와트(GW)의 발전설비에서 부족한 10.3GW를 메우는 과정에서 4.6GW의 에너지원을 정하지 않았다. 12차 전기본 때 정하도록 유보(3.1GW)하거나, 무탄소 에너지원끼리의 경쟁(1.5GW)의 몫으로 남겨뒀다.
에너지업계가 특히 주목하는 건 2035~2036년 시행으로 잡아둔 1.5GW 규모의 무탄소 경쟁이다. 정부(전력거래소)가 원자력, 재생, 수소 등 모든 무탄소 전원이 동일한 조건 아래 참여할 수 있는 입찰시장을 열 테니, 누가 그때까지 더 좋은 무탄소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지 경쟁해보라는 것이다.
현실화한다면 국내 최초의 이종 에너지원간 입찰 경쟁이다. 70여년 간 줄곧 에너지 공급을 주도해 온 정부는 석탄이면 석탄, 가스면 가스처럼 같은 에너지원끼리 입찰 경쟁을 시켰지만, 이종 에너지원 간 입찰 경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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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 격인 수소·암모니아가 급부상하거나, 시대적 소명을 다한 줄 알았던 석탄·가스가 배출탄소 포집 후 활용·저장(CCUS) 등 탈탄소 신기술을 앞세워 재부상할 수도 있다. 원전과 신재생은 무탄소 전원의 대표 주자로 꼽히지만, 전력 소비량에 맞춰 공급량을 조절하기 어려운 경직성 전원이란 치명적 단점도 있다. 전기는 저장이 어려운 에너지원 특성상 수급량 조절 능력도 중요한 덕목이다.
11차 전기본 실무안 수립을 주도했던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무탄소 경쟁은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갈등을 무탄소 전원끼리의 경쟁 매커니즘으로 풀어보자는 것”이라며 “11차 전기본에서 12차 전기본 때 결정하도록 유보해 둔 3.1GW도 무탄소 경쟁으로 충당하기로 못 박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