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탄생 100주년 문학그림전 화가 8명, 소설 속 30개 장면 화폭에 ‘살해’부터 형무소 면회까지 그림으로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르다 커피숍 옆으로 발길을 돌리면 뜻밖의 공간이 나타난다. 사계절 쉬지 않고 전시가 이어지는 공간. 바로 ‘교보아트스페이스’다. 이곳에서는 8일부터 박경리(1926~2008)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하소설 ‘토지’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되살린 문학그림전 ‘하늘의 빛, 땅의 빛-박경리 ’토지‘ 그림으로 만나다’가 열리고 있다. 26년에 걸쳐 완성된 방대한 이야기를 화가 8명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풀어내 30점의 그림에 담았다.
이동환 '화염'(사진=이윤정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면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그림이 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엉켜 화면을 집어삼킬 듯 타오른다. 이동환의 ‘화염(火焰)’이다. 작품은 ‘토지’ 1부 3편 6장 ‘살해’의 한순간을 그렸다. 김서방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시체를 끌어내며 “나으리! 나, 나, 나으리가 돌아가셨다아!”라고 절규하는 장면이다. 활자 속 비명은 화폭에 옮겨지면서 거대한 불길이 됐다. 글로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긴박함이 붉고 거친 색채를 입고 눈앞에 펼쳐진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마주 보는 장면도 시선을 끈다. 박영근의 ‘마주보다’다. ‘토지’ 3부 4편 7장 ‘마약의 심연’에서 형무소를 찾은 서희의 장면을 옮겼다. 소설은 그곳을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과 붉은 벽돌담이 겹친 “우중충한 풍경”으로 묘사한다. 그림에서는 그 막막한 거리를 촘촘한 철창으로 표현했다. 바로 앞에 두고도 닿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이 형무소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영근 '마주보다'(사진=이윤정 기자).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미투리 한 짝도 화가의 눈을 거치면 이야기가 된다. 이동환의 ‘초록은 동색’은 ‘토지’ 1부 2편 18장에 등장하는 벌당아씨의 흔적을 화폭에 옮긴 작품이다. 일행이 언덕 아래 초막을 발견했을 때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땅바닥에는 여자의 미투리 한 짝만 남아 있다. 구천이 벌당아씨를 업고 달아났음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다. 이동환은 이 장면을 거칠게 일그러진 인물들의 얼굴과 붉고 어두운 색채로 풀어냈다. 소설 속 미투리 한 짝이 그림에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암시하는 불길한 흔적으로 바뀐다.
박영근의 ‘생명의 부활’에서는 강렬한 노란빛 화면 중앙에 자리한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토지’ 2부 1편 12장 ‘작은 새의 죽음’에서 길상은 새끼를 주워온 소년에게 “새 새끼를 죽여왔다면서?”라고 묻는다. “그냥 두면 굶어 죽을 성싶어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살리기 위해 데려왔지만 새끼는 끝내 살아나지 못한다. 화가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역설적으로 ‘생명의 부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손 위에 놓인 작은 생명과 화면을 가득 채운 노란색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되묻게 한다.
박영근 '생명의 부활'(사진=이윤정 기자).
‘토지’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 가운데 무엇을 그릴지는 누가 정했을까. 먼저 화가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됐다. 교보아트스페이스의 문화기획위원 2명과 ‘토지’라는 전시 주제를 공유하고, 작품 세계와 잘 어울리는 작가들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길현·김선두·박문종·박세진·박영근·안중경·이동환·홍승희 등 서로 다른 화풍을 지닌 8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방대한 소설에서 그림이 될 장면 30개를 추리는 일은 이승윤 토지학회 회장이 맡았다. 1부에서 10개, 2부 5개, 3부 4개, 4부 5개, 5부 6개를 골랐다. 유명한 장면만 골라 모은 것은 아니다. 첫 그림부터 마지막 그림까지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토지’의 긴 이야기를 한 번 훑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30점의 그림이 거대한 소설을 압축한 하나의 ‘서사 지도’인 셈이다.
전시 제목 ‘하늘의 빛, 땅의 빛’도 ‘토지’ 속 문장에서 가져왔다. 4부 1편 12장 ‘독창회’에 등장하는 구절로, 자연이 가진 여러 빛을 자신의 내면에 담고 싶어 하는 인물의 마음을 표현한 대목이다.
문학과 그림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문학그림전’은 2006년 시작됐다. 박태원·이상·백석·황순원·윤동주·신동엽·김소월·김수영·김춘수·이육사 등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화폭으로 옮겨왔다. 올해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박경리의 ‘토지’다. 방대한 소설을 다시 완독할 엄두가 나지 않아도 괜찮다. 서점에 들른 김에 작은 전시장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된다. 글로만 기억했던 ‘토지’의 장면들이 그곳에서 색을 입고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 열린다.
문학그림전 ‘하늘의 빛, 땅의 빛-박경리 ‘토지’ 그림으로 만나다’ 전경(사진=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