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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동유럽에 ‘아웃사이더’ 돌풍이 불고 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정치경력이 전무한 환경운동 변호사 출신의 여성 주사나 카푸토바(45)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슬로바키아의 첫 여성 대통령이다. 같은날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도 정치 경험이 없는 코미디언 출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1차 경선에서 1위를 차지, 결선행을 확정지었다.
기성 정치권의 부패에 반발한 국민들이 두 사람을 국가 최고 지도자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정치 신예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인 아니라 ‘새롭고’ ‘깨끗하다’는 인식이 표를 끌어모은 것이다.
◇기성정치 반발한 슬로바키아 국민…정치신예 여성대통령 선택
카푸토바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진 연설에서 지지자들에게 “(선거) 결과뿐 아니라 포퓰리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 공격적인 어휘 없이도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행복함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국민 통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슬로바키아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카푸토바는 58.3%의 득표율로 41.7%를 얻은 마로스 세프쇼비치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카푸토바는 원외 정당 ‘진보적 슬로바키아’ 소속인 반면, 세프쇼비치는 연립 여당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소위 거물급 정치인이다.
카푸토바 돌풍의 시작은 작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인근 자택에서 탐사보도 전문매체 기자인 얀 쿠치아크와 약혼녀 마르티나 쿠스니로바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쿠치아크는 로베르토 피초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인들과 기업가 및 이탈리아 마피아의 유착을 취재해 왔다. 쿠치아크의 동료 기자들은 그의 미완성 기사를 그래도 보도했다. 파장은 일파만파 커졌다.
슬로바키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의 시위가 발발했다. 수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정치 신인이었던 카푸토바도 동참했다. 피초 전 총리는 사건과 자신이 무관하다고 해명했지만 평소 언론 검열을 실시해왔던 터라 비판과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피초 전 총리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안드레이 키스카의 연임도 저지시켰다. 하지만 피초 전 총리는 사퇴 후에도 사회민주당 당수직을 유지해 비판을 받았다.
카푸토바는 “막후 조종을 끝내야 한다”, “악과 부패에 맞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 CNN은 “쿠치아크 커플의 피살 사건이 카푸토바의 대선 출마 동기를 부여했다”고 전했다. 카푸토바는 14년 간 자신의 고향에서 불법 폐기물을 매립한 기업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였는데, 기업의 대표 마리안 코크너가 쿠치아크 살해 배후로 지목돼 기소된 인물이다.
카푸토파는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매립 불허 판결을 받아냈고, 지난 2016년 환경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먼 환경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슬로바키아의 ‘에린 브로코비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여성 환경운동 법률가의 승리를 다룬 헐리우드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유명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을 맡았다.
카푸토파는 정치적으로 보면 비주류 아웃사이더다. 슬로바키아에서는 불법인 동성결혼을 비호하며, 이혼 후 두 딸을 둔 싱글맘이다. 그가 속한 정당은 의석조차 없다. 그럼에도 그가 첫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반발 및 부패 척결에 대한 국민 열망 때문이라고 CNN 등 외신들은 분석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실권은 총리가 갖고 있지만 대통령은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또 내각 구성 승인권과 헌법재판관 임명권 등 주요 권한도 갖고 있다. CNN은 자유주의자 변호사인 카푸토바가 헝가리, 이탈리아, 체코, 덴마크 등지에서 불고 있는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에 제동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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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토바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코미디언 출신 배우가 결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주인공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다.
젤렌스키는 1차 투표 출구조사에서 30.4%를 득표해 선두를 확정지었다. 연임을 노리는 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17.8%)과 세 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14.2%)를 크게 앞섰다.
과반 이상의 득표자가 없어 1차 투표 선두 2명에 대한 결선 투표가 오는 21일 진행될 예정이다. 표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별다는 변수가 없다면 젤렌스키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과거 그가 TV드라마에서 맡았던 역할이 현실이 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젤렌스키는 지난 2015년 방영된 TV 정치풍자 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에서 주인공을 맡아 국민 배우로 부상했다. 서민 출신으로 부패와 싸운 끝에 대통령이 되는 역할이었는데,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장난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대선은 국민들에게 매우 진지한 행사다. 젤렌스키도 카푸토파와 마찬가지로 기성 정치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인기를 얻었다.
젤렌스키는 선거 유세를 거의 펼치지 않았고 인터뷰도 사실상 전무했다. 주로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게 전부였으며, 강력한 정치적 견해나 공약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BBC는 설명했다.
젤렌스키에 대한 지지율은 1년 전만 해도 한자리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통령을 둘러싼 방산 비리가 터져나온 뒤부터 지지율이 급등했다. 러시아 위협으로 군 복무가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는 우크라이나에서 군과 관련된 비리는 가장 악질적인 범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러시아에 맞서겠다며 지난 2014년 33억달러였던 국방 예산을 올해 78억달러로 2배 이상 늘렸다. 그런데 지난 2월 국방위원회 부의장인 올레 글라드코프스키의 아들이 러시아로부터 밀수한 부품을 우크라이나 방산업체에 비싸게 판매한 혐의로 고발됐다. 글라드코프스키는 초콜릿 재벌 출신인 포로셴코 대통령의 사업파트너였다가 국방위원회 부의장에 앉은 인물이다.
친러시아 반군이 장악한 동부 돈바스 지역을 되찾겠다는 2014년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등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잠재우지 못한 상황에서 비리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후 포로셴코 대통령을 지지하던 유권자 중 상당수가 젤렌스키 쪽으로 옮겨갔다.
공용어 선택을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모두 택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유권자 확보에 도움이 됐다고 BBC는 전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얻었다.
젤렌스키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것에 기쁨을 표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공직을 팔지 않을 것이다. 또 야권 인사들을 기용하는 것도 논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안보, 국방 및 외교 정책에 있어 중요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