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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극심한 불황을 겪으며 여천NCC 등 주요 공장을 폐쇄하거나 가동률을 대폭 낮춘 상태였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납사의 절반가량은 수입에, 나머지 절반은 국내 정제 시설에 의존하는데, 이미 국내 생산량이 크게 쪼그라든 상황에서 중동발 위기까지 터진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국제 유가의 변동성이 극에 달하자, 손실을 막기 위해 석유화학 업체들이 기초 소재 공장 가동률을 보수적으로 운영하거나 출고 물량을 선제적으로 통제하며 시장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하지 않는 호주산 납사를 들여오려 해도 전 세계적인 품귀 현상 탓에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라며 “비닐과 플라스틱 용기의 핵심 원료인 폴리에틸렌(PE) 등 석유화학 제품 전반에 도미노 수급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에 따라 식품 기업 본사 및 포장재 협력업체들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수지는 물론, 용기, 캡(뚜껑), 필름(연포장) 등 전방위적으로 수급 타격을 입고 있다.
업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쟁 장기화 국면이다. 최근 공시된 주요 식품사들의 사업보고서(저장품 기준)를 분석한 결과, 포장재를 포함한 재고 비축 물량은 길어야 두세 달을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1위 식품기업 CJ제일제당의 재고는 약 1.5개월 내외면 소진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스낵 비중이 높은 롯데웰푸드는 약 2개월, 라면 중심인 농심(율촌화학)은 약 2.5개월 이상인 것으로 분석됐다. 협력사에 의존하는 오뚜기 측은 “비축 중인 원료(수지) 재고가 1개월 치 수준에 불과하고 영세한 협력사는 1개월 치 미만인 곳도 다수인데, 현재 석유화학 업체들마저 출고량을 제한하고 있어 추가 비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현장의 진짜 상황은 공시된 장부상 숫자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 1.5~2.5개월이라는 수치는 어디까지나 ‘원료’가 포함된 재고자산 회전율일 뿐, 당장 제품을 담을 수 있는 ‘순수 포장재’ 재고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대형 식품사 관계자는 “포장재는 부피가 워낙 커서 공장이나 창고에 다 쌓아둘 수 없다 보니, 자회사나 협력사에 짧은 주기로 필요한 만큼만 납품받아 생산하는 방식을 쓴다”며 “실제 현장 창고에 비축된 포장재 물량은 길어야 2주(14일) 치가 전부라, 당장 사태가 풀리지 않으면 공장 라인을 세워야 하는 피말리는 비상상황”이라고 했다.
식품 포장재는 급하다고 시중에서 아무 비닐이나 대체해 쓸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빛과 수분을 완벽히 차단해 유통기한을 유지하려면 여러 겹의 특수 다층 필름(연포장) 기술이 필수적이고, 제품별 성분표와 디자인이 사전에 인쇄되어야 한다. 평소라면 자회사나 협력사가 필요한 수량에 맞춰 즉각 생산해 주었지만, 석화업계가 원료를 묶어버리면서 이 톱니바퀴가 멈춰버렸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비닐뿐만 아니라 생수 페트병, 두부 용기 등 담을 수 있는 모든 포장재가 동나고 있다”며 “사태가 장기화되면 자칫 소비자들이 직접 냄비나 빈 용기를 들고 마트에 와서 음료나 과자를 담아가야 할 판”이라고 현장의 극단적인 위기감을 전했다.
자본력과 대규모 물류망을 갖춘 기업들조차 당장 2주 뒤를 장담할 수 없는 셧다운의 턱밑까지 온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중견 기업들이다.
이종우 남서울대 유통마케팅학과 교수는 “대기업들은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비싼 값에 어떻게든 포장재를 구해올 수 있지만, 중소 식품사들은 대응할 여력조차 없어 사태가 장기화되면 위험이 커질 수 있다”며 “코로나 초기 마스크 대란 때처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시장의 수급을 관리하고, 정부 비축분을 시장에 신속히 풀어 K푸드 생태계의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