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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10시 제주 전역에 1분간 묵념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시작된 ‘제76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는 김옥자 할머니의 사연이 전해졌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추념식 무대에 오른 김 할머니 손녀 한은빈(17)양은 “할머니는 새해 달력을 걸 때면 제일 먼저 할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찾아본다.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저도 홀로 남겨진 딸 자식이 돼 어두운 그늘 속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애처롭다는 생각을 거두지 못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한 양이 밝힌 김 할머니의 사연은 이랬다. 김 할머니가 5살이었던 1948년 초겨울 4.3사건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살던 곳을 뒤로하고 화북리 곤을동 마을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며칠 뒤 본래 살던 집에 남겨두고 온 소에 여물을 먹이기 위해 길을 나선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이후 발견된 주검은 돌로 심하게 머리가 훼손된 모습이었다.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몇 달 후 어머니마저 화북천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고, 김 할머니의 남동생도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막내 고모 밑에서 살다 15살 때 육지로 가 공장 여공과 채소장사, 식모살이 등을 이어가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다 다시 제주도 돌아왔다.
이날 영상을 통해 비춘 김 할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졌던 아버지였기에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오열했고 추념식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한 양은 “할머니의 가장 큰 슬픔은 이제 얼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망각”이라며 “저희 할머니의 시간은 여전히 ‘다섯살 옥자’에 머물고 있지만 그리움에 사무친 아버지 얼굴은 그 시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할머니의 친족들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천 장의 인물 사진을 대조, AI 기술을 통해 김 할머니의 아버지 고(故) 김병주 씨의 젊었을 적 모습이 복원됐다.
영상에서 하얀 도포를 입은 모습으로 “옥자야, 아버지여. 하영 기다렸지? 이래 오라. 우리 똘 얼마나 커신지 아버지가 한 번 안아 보게”라며 두 팔을 벌렸다. 이 모습을 본 김 할머니는 손녀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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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2025년까지 추가 진상조사를 빈틈없이 마무리해 미진했던 부분도 한층 더 보완해 나가겠다”며 “생존 희생자·유가족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트라우마치유센터 설립·운영에 더욱 힘쓰고 국제평화문화센터 건립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도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