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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공정거래법은 총수(동일인)의 기업 사유화 또는 승계 등과 관련해 기업 내부 의사결정이나 지배구조 문제까지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공정거래법이 시장 집중을 넘어 소유 집중도 억제하고 있는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직접 대기업집단 총수를 지정하고 총수를 중심으로 사익편취 등 각종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를 위반할 때 이에 따른 행정제재와 함께 형벌도 적용된다.
반면 미국 등에서는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견제는 상법이나 회사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수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은 경영자의 사익추구를 차단하고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 최종 목적인 주주가치 극대화로 연결된다. 만약 경영진의 사익추구로 인해 주주가치가 낮아졌다면 즉각 상법에 따른 주주대표소송이나 다중대표소송 등을 통해 견제를 받는다. 공정거래법이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법 개정을 통한 공정거래법 규율의 최소화를 제안하는 대표적 학자다. 현재 상법에 충분한 주주 견제수단이 없기에 공정거래법이 상법 대신 나서고 있는 것이라면 상법 개정 또는 충분한 개정을 조건으로 공정거래법을 통한 규율은 한시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공정거래법과 상법을 아우르는 중장기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공정위(공정거래법)와 법무부(상법)로 나눠져 있는 관할 주체와 다른 분야 전문가가 모여 고민해야 정합적 개선안이 나올 것”이라며 “공정위가 어쩔 수 없이 법 집행을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부권소송(국가가 피해자 대신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가 됨)처럼 소액주주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법조계에서는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충분히 구제받을 수 있다면 공정거래법상 형벌이 최소화돼도 기업을 견제·감독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개인 민사소송은 증거 확보의 문제로 쉽지 않다.
이인석 법무법인 광장 공정거래그룹장은 민사적 구제수단의 활성화 방안으로 디스커버리(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를 제안했다. 미국과 영국 등이 시행 중인 디스커버리제는 개인인 원고가 기업이나 국가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낼 때 증거확보권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합리적 이유 없이 상대방의 서류 제출 요청을 거절하면 법원 처벌과 제재를 받을 수 있다. 개인이 기업과 대등하게 증거를 확보하고 싸울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이 변호사는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제도가 효과적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라도 디스커버리제가 도입돼야 한다”며 “증거 확보가 용이하면 민사소송도 활발해질 수 있고 형벌조항이 많은 공정거래법을 대신해 기업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지금은 권고 수준인 법원의 문서송부촉탁 권한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것도 민사적 구제의 활성화 방안으로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