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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지에서 삼성 내부회의를 주재하던 고(故) 이건희 회장은 프랑스 루브르·영국 대영·미국 스미스소니언 등 해외 유수 박물관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한국의 문화재·미술품 관리 현실을 한탄했다. 이들 박물관은 주로 개인이 소장해온 골동품과 작품을 기증받아 세계적 박물관으로 거듭난 곳이다. 1997년 생전에 쓴 유일한 에세이와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 연설문에서도 고인은 같은 맥락의 언급을 했었다.
“문화자산 보존은 시대적 의무”라는 이 회장의 가치관이 드디어 현실로 이뤄졌다. 20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이건희컬렉션이 베일을 벗은 것이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이 회장이 평생 모은 개인소장품 가운데 고미술품 2만1600여 점, 국내외 작가들의 근대미술품 1600여 점 등 모두 2만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제주 이중섭미술관, 양구 박수근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서울대미술관 등에 기증한 바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기증 사례다.
이를 두고 문화계에선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컬렉션”이란 평가가 나왔었다.
삼성 측 관계자는 “‘국립박물관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전 고인의 언급에 비춰 고인이 일찌감치 희귀 소장품의 기증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유족들은 고인의 말씀을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상속이라는 데 뜻을 함께 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문화자산을 일종의 ‘사회 인프라’로 인식해왔다. 에세이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인프라를 향상시키는 데 한몫을 해야 한다’고 적은 부분, 리움 개관식에서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란 발언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으로선 지정문화재 및 예술성과 사료적 가치가 높은 미술품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어서 더 뜻깊을 수밖에 없다.
삼성의 ‘통 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이어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미술품 기증 외에도 △감염병 극복을 위한 병원·연구소 건설 및 백신·치료제 개발에 7000억원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환자 지원에 3000억원을 기부하는 한편, 국내외 통틀어 역대 최대 수준인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납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