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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는 “1910년 이전까지의 모습을 보면 성공한 개화인으로서의 모습만 드러난다”며 이후의 행적은 전혀 달랐다고 지적했다.
특히 1918년 1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박 작가는 “당시 기사에서 ‘나는 일본인이다. 그래서 매운 음식도 잘 먹지 못한다’라고 표현했다”며 “자녀들에게도 집에서 일본어만 쓰게 하고 조선 옷은 입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보통의 한국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라며 “상당한 친일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부연했다.
다만 안상호의 이름은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박 작가는 해당 명단이 ‘중요 친일파’ 위주로 우선 등재된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박 작가는 “여기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은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며 “중요 친일파가 먼저 올라갔고 다른 사람들은 추가 연구를 통해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호가 명단에서 빠진 배경에 대해서는 당시의 등재 기준을 원인으로 들었다. 그는 “등재 근거가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거나 조직의 간부여야 했다”며 “안상호는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일반 회원 개념이었고 독립운동가를 고발하는 등의 구체적 행위가 드러나지 않아 배제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의 고종 독살 연루설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를 통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고종이 승하한 1919년 1월 21일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혼인을 나흘 앞둔 시점이어서 일제가 고종을 독살해 얻을 정치적 실익이 크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끝으로 박 작가는 법적 처벌과 역사적·사회적 책임은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작가는 “당시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 퇴학을 당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 후손들 역시 사회적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며 “죄에 따라서 벌을 받는 것과 후손이나 공동체가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는 책임의 문제는 별개”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후손들에게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자기 가문을 살펴볼 수 있는 바탕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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