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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우리의 연극은 ‘지금 여기’ 인간다운 삶의 진실을 담는다.”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 있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문구다. 국립극단이 2010년 재단법인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선언문이다. 그러나 국립극단은 지난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검열의 중심에 서면서 선언문의 정신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국립극단이 올해 하반기 프로그램으로 오는 9월 8일부터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선보이는 ‘2018 연출의 판’은 바로 이 국립극단 선언문을 주제로 한 4편의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그동안 국립극단이 비판을 받아온 공공성과 동시대성에 대한 연극인들의 고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이성열 예술감독이 취임 이후 처음 기획한 작품 개발 프로젝트로 극단 그린피그 대표인 연출가 윤한솔이 ‘연출의 판’을 총괄하는 감독을 맡아 이번 기획을 준비해왔다.
30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만난 윤한솔 감독은 “그동안 특정 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작업과 형식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 연출가들 중 4명의 조합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이들을 선정했다”며 “국립극단 선언문을 주제로 지난 정권에서의 국립극단을 외부의 시선으로 돌아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각 연출가의 작업과 맞닿아 있는 부분 탐색했다”고 말했다.
윤한솔 감독이 직접 섭외한 네 명의 연출가는 △응용연극연구소의 박해성(‘프로토콜’, 9월 8~10일) △극단 북새통의 남인우(‘가제 317’, 9월 15~17일) △플레이씨어터 즉각반응의 하수민(‘아기’, 10월 5~7일) △이언시 스튜디오의 김지나(‘잉그리드, 범람’, 10월 13~15일) 등이다. 이들은 국립극단 선언문에 대한 치열한 토론 과정을 거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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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우 연출은 “연극의 틀을 버리는 실험이라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2013년 국립극단에서 연극 ‘구름’으로 블랙리스트 검열 사태를 겪었던 남인우 연출은 “당시에는 국립극단 상황이 어수선했고 왜 공연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공연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며 “지금은 자기검열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보다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남인우 연출과 마찬가지로 국립극단에서 작업 경험이 있는 박해성 연출도 “이전까지는 작품의 결과물이 중요했다면 이번 ‘연극의 판’은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이 필요 이상을 무겁고 엄숙해진 이유는 연출의 탓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극장이라는 곳이 일상과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연출이 없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이용해 공연을 준비하는 연극도 있다. 김지나 연출은 “연출의 형식적 실험을 하라는 제안에 연습실에서 작품을 연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걸 의심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10명의 배우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익명으로 만나 작품을 연습하고 있다. 김지나 연출은 “연극이 그동안 당연하게 고수해온 것들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공연 작품 개발 프로젝트는 신진 작가 또는 연출가를 대상으로 한다. ‘연출의 판’의 차별점은 기성 연출가에게도 작품 개발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윤한솔 감독은 “젊은 연출가보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연출가 중 각자 작업에서 도약의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험과 도전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며 “앞으로도 특정 주제를 정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기획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