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경기도 시화공단에 위치한 셋톱박스 제조사 마르시스의 외주 생산 공장에서 만난 권오길 생산담당 부장은 이같이 밝혔다. 이날 외주업체인 에스엠트로닉스 공장 5층 조립 라인에 들어서자 바깥의 후텁지근한 공기와 달리 서늘하고 쾌적한 냉기가 감돌았다. 컨베이어 벨트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고, 그 위에서는 KT의 인공지능(AI) 셋톱박스 ‘지니 TV 셋톱박스 A2’가 조립과 테스트를 거쳐 차례로 완성되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시간당 200~250대, 하루 평균 2500여대의 셋톱박스가 만들어진다.
|
메모리값 급등에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이 생산라인이 가동될 수 있었던 것은 KT(030200)가 협력사에 메모리 구매 선금을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업체는 셋톱박스에 들어가는 메모리 가격이 급등하면서 과거에는 큰 부담 없이 확보할 수 있었던 재고가 이제는 수십억원에서 최대 1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2층 자재 창고에서는 메모리 등 주요 부품을 보관하기 위한 온도·습도 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현장 온도는 23.6도, 습도는 8.3%였다. 메인 집적회로(IC)와 메모리 등은 보관 환경에 따라 생산 과정에서 불량이 발생할 수 있어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김기훈 마르시스 사업 1팀장은 “메인 IC나 메모리 IC 등 주요 자재는 습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생산 과정에서 불량이 발생할 수 있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진공 포장된 메모리 한 팩에는 LPDDR5 32GB 램 1050개가 담겨 있었다. 가격은 약 6만달러로, 한화로 8000만이 넘는 수준이다. 동일한 제품과 수량을 기준으로 과거 6000달러 안팎이던 가격이 2~3년 사이 10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메모리 가격 급등은 제조 원가 구조까지 바꿔놓았다. 과거 셋톱박스 납품가에서 10%에도 못 미쳤던 메모리 원가 비중은 최근 60~70% 수준으로 높아졌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제품 전체 원가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재고 확보에 필요한 자금도 급증했다. 과거에는 한 달치 메모리 재고를 확보하는 데 10억원이 채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 달 물량을 준비하는 데 수십억원에서 최대 1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이 필요하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재고 확보 자체가 경영 부담이 된 셈이다.
마르시스는 KT를 비롯해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032640), kt스카이라이프와 케이블TV 사업자 등에 셋톱박스를 공급한다. 일본과 유럽 등 해외 시장에도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약 30년의 업력을 가진 제조사지만, 메모리 가격 급등은 피하기 어려운 부담이다.
|
KT는 메모리 수급 불확실성과 가격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사에 구매 선금을 지원하고 있다. KT가 협력사 전체에 지원한 선금은 365억원을 넘는다. 이 가운데 마르시스가 받은 금액은 두 차례에 걸쳐 약 212억원이다.
선금 지원의 핵심은 협력사가 메모리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필요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자금 부담을 나누는 데 있다. 마르시스는 이번 지원을 통해 메모리 약 40만대분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다. 상반기에도 약 20만~23만대분의 메모리를 확보해 납품 물량을 준비했다.
KT는 두 차례의 지원으로 협력사들이 총 104억원의 메모리 구매 비용을 절감했다고 설명했다. 1차 지원으로 DDR4 등 주요 메모리를 선제 확보해 22억원, 2차 지원으로 LPDDR5와 eMMC 등 메모리를 확보해 82억원을 각각 절감했다는 것이다.
권봉규 마르시스 영업마케팅 본부장은 “재고가 충분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자금을 보유했느냐에 따라 회사의 생존이 갈리는 상황”이라며 “KT가 내부를 설득해 가며 적극적으로 선금을 지원해 준 덕분에 원하는 시점에 메모리를 구매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르시스는 KT와 약 6년간 거래를 이어오고 있다. KT는 마르시스 매출에서 70% 안팎을 차지하는 주요 고객사다. 올해 마르시스의 KT 납품 물량은 약 80만대, 금액으로는 약 1000억원 규모다. 마르시스의 올해 국내 전체 셋톱박스 공급량은 약 130만대, 매출은 약 1300억원 수준이다.
|
메모리 외에도 환율과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인쇄회로기판(PCB) 등 다른 부품 가격이 오르면서 제조 원가 부담은 커지고 있다. KT와 마르시스는 원자재 가격과 환율 변동을 납품대금에 반영하는 납품대금 연동제를 통해 비용 부담을 나누고 있다. 마르시스는 앞으로도 메모리 선금 지원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르시스는 베트남과 중국 등 해외 생산 기반을 활용하는 동시에 국내 공장에서도 주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생산은 해외보다 비용 부담이 높지만, KT와의 협력 아래 국내 생산라인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권봉규 마르시스 영업마케팅 본부장은 “KT와 6년간 파트너십을 이어오면서 상생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전시회에도 함께 나가는 등 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며 “메모리 가격이 급등해 중소기업이 자체 자금만으로 재고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금 지원은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