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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조선의 언론들은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전하며 아인슈타인 붐을 이끌었다”며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은 엄청난 관심 속에 진행됐고 조선에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은 지식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소양으로 인식됐다”고도 말했다.
그는 “1930년대 세계 과학계의 트렌드는 단연 양자역학였다. 1932년 하이젠베르크, 1933년 디랙과 슈뢰딩거가 노벨상을 받으며 양자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양자론은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다”며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양자론을 흡수한 조선의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을 낡은 ‘고전물리학’으로 규정하며 인과율의 부정 및 불확정성원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알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자화학을 전공한 이태규 박사는 미국 유타대학에서 아이링 교수와 비뉴턴 유체의 점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연구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며 “이를 ‘리-아이링 이론’이라 부른다. 그 업적으로 이태규는 노벨상 후보가 됐으며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 추천 위원이 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민 박사는 ”우리 선조들은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며 “그들이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였던 것은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현실 극복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