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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31일 서울 부영 태평빌딩에서 열린 이임식을 끝으로 8년간의 한은 총재 임기를 마치며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이 총재는 “과거 격변의 시기를 겪지 않았던 때가 없었듯이 8년 동안에도 안팎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며 “세월호 사고, 메르스 사태, 브렉시트, 미국과 중국간 무역갈등, 세계화의 후퇴, 급기야는 코로나에 의한 세계 보건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그야말로 격랑의 소용돌이를 지나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임기 대부분은 기존의 경험이나 지식과 많이 다른 매우 익숙치 않은 새로운 거시경제 환경에서 통화정책을 운용하지 않았나 싶다”며 “금융위기 이후 완화적 통화정책이 장기간 이어졌음에도 세계 경제가 저성장·저물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수수께끼가 코로나 사태로 더 복잡해지고 난해한 고차방정식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계부채 누증 등 금융불균형이 심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나면서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바림직한 정책 체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성장을 지키면서도 금융안정과 함께 물가를 잡을 수 있는 묘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각종 불확실성 속에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은 답을 찾는 과정에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정책 일관성이 떨어졌다며 비판을 받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중앙은행의 숙명이라고 밝혔다. 통화정책의 성과는 ‘국민의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에 비판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중앙은행의 유일한 존립기반은 국민의 신뢰라는 점을 되새기며 첫 업무를 시작했다”며 “국민의 신뢰는 일관성 있고 예측가능한 정책 운용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고 정책의 출발은 항상 시장과의 소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발언을 인용해 “통화정책은 포커 게임처럼 내 패를 감춰야 하는 비협조 게임(non-cooperative game)이 아니라 패를 보여주고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협조게임(cooperative game)”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역할 확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한국은행 법적 책무에 고용안정을 추가하거나 준재정적 활동에 중앙은행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양극화·불평등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해선 정책 수단 개발과 이행으로 구체화되고 있다”며 “여러 사회 문제 해결에 경제적 처방을 동원하고자 할수록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와 의존은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라 본연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로 역할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지 연구,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부 경영에 대해서도 소회를 밝혔다. 그는 “기존의 인사 제도와 업무수행 방식에서 비효율적 요소를 제거해 생산성을 높이고, 직원 개개인의 전문성을 제고하는 것에 역점을 뒀다”며 “직원들이 체감하기에 미흡했지만 어느 조직이든 문화, 제도를 바꿔나가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조직·인사 혁신방안의 밑그림을 그렸는데 앞으로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가는 이제 새 총재와 한은 직원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마지막으로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을 인용해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8년간 총재로서의 재임 기간을 포함해 총 43년간 한은에서 근무, 한은 역사상 최장 기간 근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앞으로도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란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