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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밖에선 장송곡이 울려 퍼졌고, 추모객들은 고인이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놓아 불렀다. 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일부가 쓰인 백 소장의 흑백 사진을 들고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발인식 이후에 백 소장이 설립했던 통일문제연구소, 생전에 즐겨 찾던 학림다방 등 대학로를 돌며 1시간 동안 풍물단이 운구행렬을 이끌며, 노제를 열었다. 노제에 참여한 전체 인원은 약 300명에 달하는 규모로 2개 차로에서 이동했다. 장례위 측은 방송차량을 통해 ‘앞뒤 간격 1.5m를 유지해 달라’고 안내했다. 경찰 측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서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에 대해서 기존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게 돼 있어 운구행렬은 집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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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 현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의자가 배치됐다. 미리 광장에 나와 있던 시민이 더해져 추모객은 1000명가량으로 늘었다.
백 소장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한 문정현 신부는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그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날 가수 정태춘씨의 추모곡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민중가수들의 ‘민중의 노래’ 합창, 시민 헌화를 끝으로 영결식을 종료했다.
이후 운구행렬은 경기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장례 절차가 끝나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비롯한 국내·외 40여 개 시민분향소는 조문을 멈추고 해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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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 소장은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7일 직접 조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
고인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67년에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을 시도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살이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됐다. 이후 1986년에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힘써왔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저서를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