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몇 주 안에 워싱턴DC 도심에 임시 표지판이 설치돼 행인들을 백악관 보고서로 안내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국립미국사박물관 관람객에게 전시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정부가 권하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스미스소니언협회 산하 박물관들을 겨냥해왔다. 그는 스미스소니언이 “통제 불능”이라며 “논의되는 모든 것이 우리나라가 얼마나 끔찍한지, 노예제가 얼마나 나빴는지, 억눌린 이들이 얼마나 이룬 것이 없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삼은 문서는 백악관이 지난달 내놓은 162쪽짜리 보고서 ‘미국의 이야기를 구하다’이다. 보고서는 이 박물관이 노예제와 정복의 유산을 지나치게 앞세우고 국가의 위대함을 기리는 일은 소홀히 해 ‘이념적 포획’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설립자들이 원한 미국의 ‘고무적인 이야기’와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문제 삼은 전시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이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 △여장 공연자를 조명한 것 △원주민 부족의 강제 이주와 몰살을 부각한 것 등이다. 보고서는 “박물관 지도부가 미국의 이야기를 함께 물려받은 국가적 유산이 아니라 시민을 분열시키고 낙담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다루는 이념적 틀을 채택했다”고 결론지었다.
이 흐름의 배후에는 37세 변호사 린지 핼리건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골프클럽에서 그를 처음 만난 핼리건은 지난해 “박물관에 잘 가지 않는 사람”인 대통령에게 전시 방향을 문제 삼아 알렸다. 핼리건은 최근 방송인 빌 오라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유물이 인종과 성별, 성 정체성의 잣대로만 해석된다며 “6학년 때 견학 갔던 그 스미스소니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흑인 가수들의 로큰롤 음악이 담긴 1950년대 주크박스 전시가 백인우월주의 수업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그가 든 사례다.
직접 못 건드리자 우회로…버티는 스미스소니언
미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를 둘러싼 다툼은 250년간 이어져왔고, 트럼프 대통령 두 번째 임기 들어 한층 거세졌다. 공화당은 남부연합 장군들의 이름을 군 기지에 되돌려놨고,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문화의 중심인 케네디센터를 장악한 뒤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 시도했다.
백악관이 표지판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것은 스미스소니언을 직접 손대기 어려워서다.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국립공원의 역사 안내판은 뜻대로 바꿔놨지만 이곳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46년 의회가 세운 스미스소니언은 해마다 10억달러(약 1조 3950억원) 넘는 연방 예산을 받지만, 정부가 직접 통제하지 않고 연방대법원장과 JD 밴스 부통령 등이 참여하는 초당파 이사회가 운영한다.
정치적 압력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초에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폭격기 ‘에놀라 게이’ 전시가 의회 반발로 무산되고 고위 인사가 물러났다. 하지만 흑인 최초로 사무총장에 오른 로니 번치를 비롯한 현 지도부는 백악관의 공세에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있다. 앤시아 하티그 국립미국사박물관장은 지난달 의회에서 “역사는 대단히 까다롭다”며 “풍부하게 이야기하려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유물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미스소니언은 논평을 거부했다. FT가 이번 주 해당 전시장을 찾았을 때 보고서가 비판한 벽면 설명문은 그대로였다. 안내 직원은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를 소유했고, 조지 워싱턴은 노예 신분을 유지시키려 자유주(州)인 펜실베이니아로 이들을 번갈아 데려갔다고 설명했다.
|
역사학계는 반발하고 있다. 베스 잉글리시 미국역사가협회 회장은 백악관 보고서를 다양성·형평·포용(DEI) 정책과 이른바 ‘워크’(‘깨어 있음’을 앞세운 진보 성향)에 반대하는 행정부 의제의 일부로 규정했고, 이 단체는 백악관이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며 ‘역사에 대한 연방정부의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데이비드 블라이트 예일대 교수는 지난달 의회 청문회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작가 토니 모리슨이 말한 ‘국가가 쓴 역사’로 끝나게 된다”며 “그것은 ‘허가받은 무지’를 만들어낸다”고 경고했다.
반면 매슈 스폴딩 힐스데일칼리지 부총장은 개혁이 미국사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던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노예제도, 원주민도 이야기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관람객이 그 논의의 맥락을 이해할 무언가를 먼저 줘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를 주도한 빈스 헤일리 백악관 관계자도 박물관이 이념 활동의 도구로 쓰이길 바라는 미국인은 극소수라고 밝혔다.
의회에서도 제동이 걸렸다. 공화당 소속 리사 머카우스키 상원의원은 민주당 제프 머클리 의원과 함께 표지판 설치 계획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만 마이크 곤살레스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기 문화를 지우는 데 11억달러(약 1조 5345억원)를 낼 것”이라며 예산 삭감을 위한 초당적 합의를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