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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나는 그들의 슬픈 처지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에 대해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들 모두 삶에서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자신과 세상을 포기헸다. 벗어날 길 없는 참담한 운명에 대한 희망 없는 체념이 그들 모두의 한결같은 특징이었고, 이 동일한 감정의 결은 겉으로 그들의 몸가짐에서도 드러났다. 그것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그렸다.”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는 스위스 제네바 낡은 셋집에 함께 살던 이웃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말 안에는 그의 대표작 ‘삶에 지친 사람들’(1892)의 비밀이 거의 다 들어 있다. 그는 이웃들의 내면에서 하나의 감정,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앞에 체념이라는 동일한 감정을 읽어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를 관통하는 감정은 한 가지다.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 호들러는 바로 그 마음을 그리기 위해 다섯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독일 뮌헨의 대형 미술관인 노이에피나코테크에서 이 그림 앞에 서 본 사람은 안다. 다섯 인물이 거의 등신대로 나란히 앉아 우리와 마주할 때 드는 느낌은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는 감각이 아니다. 정말로 내 앞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육박, 곧 살아 있는 몸이 눈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덮쳐 온다. 그들의 무릎은 내 몸에 닿을 듯 가깝고 맞잡은 손의 마디와 세월에 팬 주름, 성긴 수염 한 올까지 손을 뻗으면 만져질 거리에 있다. 이것은 재현된 형상 앞의 감상이 아니라 낯선 타인과 한방에 마주 앉았을 때의 물리적 긴장에 가깝다. 그림은 더 이상 벽에 걸린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시는 다섯 개의 몸으로 거기 있다. 절망마저 지나가 버린 소진된 육체의 고요함. 죽음을 고요히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어찌해서 호들러가 죽음 앞의 생을 이토록 집요하게 그렸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생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으로 에워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1853년 스위스 베른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 어린 호들러는 목수였던 아버지를 폐병으로 잃었고, 열네 살이 되던 1867년에는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떠나보냈으며, 같은 병으로 18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형제자매를 차례로 잃었다. 훗날 호들러는 “가족 중에는 늘 누군가 죽어가고 있었고, 집 안에는 언제나 시신이 하나 있는 것 같았으며,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죽음은 연대다”
차비도 마련하기 어려웠던 열여덟 살 호들러는 고향 베른에서 제네바까지 ‘걸어서’ 당도했다. 제네바에서 화가의 도제로 일하며 꿈을 키웠지만 젊은이답지 않게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향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웃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거동이 불편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평생 소처럼 일하다가 시간이 다해버린 사람들이 희망은 없지만 차분하고 위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그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은 제각각이지만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우주의 질서에 맞닿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호들러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로이자 연대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곧 자신의 조형적 원칙으로 삼았다. 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나란히 앉히는 방법으로 말이다.
화가로 성공한 이후에도 호들러는 다시 한 번 살을 에는 듯한 연인의 죽음에 직면한다. 그는 자신의 모델이자 연인이 암에 걸려 죽어가는 2년 남짓한 시간을 곁에서 지켰다. 침상에 있는 모습,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숨이 가늘어지는 모습을 수십 점의 소묘와 그림으로 남겼다. 처음에는 창가에 기대앉아 그를 마주보던 연인이 자리에 눕고, 두 뺨의 살이 빠지고, 눈이 움푹해지고, 마침내 숨이 멎어 고요해지기까지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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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인 붙잡아둔 붓…누가 돌을 던지랴
죽은 연인의 침상 곁에 화판을 세우고 마지막 모습을 그린 호들러를 우리는 냉혹하다고 말해야 할까. 오히려 그가 견딜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리는 동안만큼은 사라져 가는 연인이 화폭에 붙들려 그의 눈앞에 머물렀고, 붓끝이 윤곽을 따라가는 그 순간만큼은 죽음이 아직 연인을 온전히 데려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림은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는 필사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이 죽음을 응시한 밑바닥에는 더 오래된 마음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호들러를 속절없이 덮치던 죽음들, 가족이 하나씩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성인이 되고 화가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그 죽음에 정면으로 마주서고 싶었던 것 같다. 붓을 든다는 것은 대상을 응시하고 그 정체를 알아내려는 행위다. 연인이 스러져 가는 과정을 한 장 한 장 기록하는 일은, 평생 그를 짓눌러 온 죽음의 실체를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이 죽어가는 연인 연작은 마침내 호들러 자신의 생애 한복판에서 정점을 이뤘다.
말년의 호들러는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위스 지폐에 그림이 실렸고 조국에서 가장 값비싼 화가가 됐다. 그러나 부도 명성도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연인을 떠나보낸 뒤 그 자신도 병들어 몸이 무너져 가자 호들러는 대작을 그릴 힘을 잃었다. 대신 제네바 아파트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 창 하나를 통해 내다보이는 레만호를 그리고 또 그렸다. 세부를 모두 벗겨낸 이 잔잔한 풍경 속에서 진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사라진 뒤에도 있을 항구적인 고요뿐이라고 여겼다. 평생 남들의 죽음을 배웅하고 이제 자신의 차례를 앞둔 그가 창밖의 변함없는 호수를 응시하며 얻은 마지막 평정이었다. 그렇게 3년여를 보낸 1918년 5월, 호들러는 그 호수를 그리다가 예순다섯의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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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호들러는 19세기에서 모더니즘으로 건너가는 결정적 다리로, 스위스가 낳은 첫 위대한 근대화가로 평가받는다. 스위스가 사랑하는 ‘국민화가’였던 호들러가 서양미술사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의 그림은 오르세와 메트로폴리탄을 비롯한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2018년 서거 100주년에는 제네바와 베른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려 그 위상을 확인시켰다.
호들러를 향한 시선이 마냥 찬미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세기말 형이상학적 모호함에 사로잡힌 화가라는 비판도 여전히 남아 있고, 국민화가라는 애국적 이미지에 가둬 온 관성을 넘어서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재평가의 바탕에는 하나의 합의가 있다. 호들러가 가장 사적인 슬픔에서 길어올린 형식으로 인간 보편의 물음에 답하려 했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오늘까지 그의 그림을 살아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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